[TEN 리뷰] ‘말모이’, 정감 가득한 이들이 지켰던 정갈한 우리말

[텐아시아=김지원 기자]

영화 ‘말모이’ 포스터./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더 램프

극장에서 일하던 판수(유해진)는 아는 동생과 짜고 몰래 손님의 돈을 훔치다 적발된다. 극장에서 해고된 판수는 경성제일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덕진의 수업료을 구하기 위해 경성역에서 멀끔하고 돈 깨나 있어 보이는 사람을 물색한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금테 안경과 양복 차림에 서류가방을 든 정환(윤계상)이었다. 판수는 정환의 가방을 훔쳐 달아났지만 가방 안에 든 것은 우리말 방언 자료였다. 조선어학회 대표인 정환은 일제의 눈을 피해 주시경 선생이 남기고 간 원고를 바탕으로 어렵게 우리말 사전 편찬을 이어가고 있었다.

조선어학회의 조갑윤 선생(김홍파)이 판수와 형무소에서 같은 방을 썼던 인연으로 판수를 조선어학회 심부름꾼으로 데려온다. 판수를 하찮은 소매치기범으로 여기는 정환은 영 탐탁지 않지만 판수는 넘치는 재치로 학회 회원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학회에서 심부름을 해야 하는 판수에게 한 가지 문제점은 까막눈이라 한글을 못 읽는다는 것. 정환은 판수에게 한 달 내에 한글 읽기와 쓰기를 떼라고 지시한다.

판수는 아들의 수업료를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상황. 싫어도 꾸역꾸역 한글 공부를 해나가던 판수는 어느새 한글을 배우는 재미에 푹 빠진다. 성냥으로 기역, 니은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길을 걸으면서 간판도 읽어본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학회 회원들이 왜 사전을 만들려고 하는지도 점차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돕는다.

영화 ‘말모이’의 한 장면.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더 램프

‘말모이’는 실제로 주시경 선생이 1911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던 최초의 국어사전 원고를 일컫는 말로, 사전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영화에서 조선어학회가 사전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우리말을 모았던 비밀 작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는 1942년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당시 일본은 조선어학회 한글학자 33인을 체포했고, 이들 중 2명은 옥에서 숨을 거둔다. 극 중 인물은 가상이지만 이야기의 큰 틀은 실화에 따르기 때문에 전개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음 장면이 궁금해지는 것이 이 영화다.

‘말모이’는 우리말 사전 편찬 과정을 지나치게 계몽적이거나 억지 감동 코드로 풀어내진 않는다. 소시민인 판수의 시선을 통해 어렵고 멀게 느껴질 수도 있을 역사적 사건을 일상적인 이야기로 만들며 공감을 자아낸다. 극 중 지식인인 정환에게도 인간미가 풍겨난다. 냉철해 보이지만 그의 가슴에는 우리말을 지키겠다는 신념이 들끓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악역이 돼버린 이들은 미우면서도 안타깝다. 이 영화의 악역은 결국 민족정신을 짓밟으려 했던 일제의 탄압인 것이다.

판수를 연기한 유해진은 특유의 재치와 기지로 말맛을 제대로 살렸다. 유해진이 판수 같고, 판수가 유해진 같다. 투박하면서도 정겹다. 판수가 우리말을 배워나가는 장면에서는 정환 역의 윤계상과 티격태격하는 케미가 구미를 당긴다. 으르렁대던 두 사람이 말과 함께 마음을 모으며 진정한 동지로 거듭나는 모습은 먹먹한 감동을 선사한다. 조선어학회 회원을 연기한 김홍파, 우현, 김선영, 민진웅, 김태훈 등도 영화에 적당한 양념을 뿌리며 감칠맛을 더한다.

김지원 기자 bella@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