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LINE, 봉준호

봉준호: 훗날 내 필모그래피를 쭉 보면 ‘설국열차’ 이전까지를 나의 초기작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 봉준호,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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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페킨파: 봉준호가 어린 시절 반한 영화감독. 비디오와 DVD가 드물었던 시절, TV는 그의 시네마테크였다. 특히 주한미군방송(AFKN)을 통해 접한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대사의 영화들은 봉준호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무슨 이야기일지 멋대로 상상하고 이야기를 구성해보는 버릇”이 생긴 건 그때. 미술을 전공한 아버지의 작업실에 가득했던 그림 관련 외국 서적들 역시 봉준호의 성장기를 설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보물들이다. 소년 봉준호는 아버지가 안 계실 때 몰래 들어가 책들을 보면서 매일 그림을 그렸고, 이는 훗날 그가 영화를 만드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이 시기 봉준호는 영화잡지를 통해 외국영화들을 탐닉했고, 중고 비디오 시장을 돌며 희귀작을 접했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 진학한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후, 친구들과 ‘노란문’이라는 영화 동아리를 만든다. 이곳에서 만든 ‘백색인’은 그의 첫 단편영화.

박찬욱: ‘설국열차’ 제작자이자 ‘올드보이’ ‘스토커’의 감독. 봉준호는 대학 졸업 후 한국영화아카데미(11기)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작업에 뛰어든다. 그때 만든 영화가 지금도 회자되는 단편영화 ‘지리멸렬’. 이준익 감독의 영화사 ‘씨네월드’에 있던 박찬욱은 이 영화를 보고 봉준호에게 먼저 연락을 했고, 그렇게 봉준호와 박찬욱의 인연은 시작된다. 두 사람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하나. ‘공동경비구역 JSA’가 개봉할 즈음에 박찬욱은 ‘살인의 추억’ 원작인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와요’를 영화로 만들 생각을 하고 판권을 사러갔다가, “이미 봉 감독이 채간 뒤”라는 걸 알게 된다. 결국 박찬욱은 ‘복수는 나의 것’을 찍었고, 다음 달부터 동명의 일본만화를 각색한 ‘올드 보이’의 촬영에 들어간다. 만약 그때 박찬욱이 ‘날 보러와요’ 판권을 구입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확실한 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은 없었을 것이고, ‘올드 보이’ 역시 빛을 보지 못했을 수 있다. 모든 물건엔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박종원: 영화감독. 현장 경험이 하고 싶었던 봉준호는 영화아카데미 선배였던 박종원 감독을 찾아간다. 당시 박종원은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 가지 이유’라는 옴니버스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고, 봉준호는 15분짜리 에피소드에 연출부와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한다. 이를 계기로 박종원 감독은 ‘모텔 선인장’ 작업을 하고 있는 박기용 감독에게 봉준호를 소개시켜줬고, 봉준호는 ‘모텔 선인장’의 조연출을 맡으며 충무로 장편영화를 경험한다. 그리고 ‘유령’ 시나리오 작업을 거친 후, 드디어 자신의 첫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세상에 내놓는다.

배두나: ‘플란다스의 개’ 주연배우. ‘플란다스의 개’는 봉준호 자신이 신혼 초 3년 동안 살던 실제 아파트를 배경으로, 그의 와이프의 처녀 때 모습을 배두나에 투영해 만든 작품이다. 서울 관객이 5만 7,000명에 그치는 등 흥행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만화적 상상력’으로 인물과 사건을 재단하는 독특한 시선으로 봉준호는 주목할 만한 신인의 등장을 알린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해당 장르의 관습들을 비틀고 뒤집음으로써 다른 지점으로 나아가는 봉준호의 특징이 발현된 것도 바로 이때다. “비디오 가게에서 이 테이프를 어느 장르 코너에 꽂아야 할지 모르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봉준호의 ‘장르영화에 대한 모호하면서도 이중적 태도’는 봉준호리즘(?)을 구성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김뢰하: ‘백색인’ ‘지리멸렬’ 등의 단편과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등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그리고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을 만나는데 결정적이 역할을 한 장본인.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의 원작인 연극 ‘날 보러 와요’를 보러 간 것은, 당시 연극에서 김 형사를 연기하고 있었던 김뢰하의 초대를 받아서다. 공연이 끝난 후 커피숍에서 김뢰하는 봉준호에게 “이 연극 판권을 사서 영화로 만들라”고 제안했고, 몇 년 후 봉준호는 김뢰하에게 “어떻게 하면 판권을 살 수 있냐”고 연락했다. 그렇게 나온 ‘살인의 추억’은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는 높은 평가는 물론,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으며 2003년 한해 극장가를 뜨겁게 달궜다. 3년 후 내놓은 ‘괴물’로 다시 한 번 흥행과 평단의 격찬을 받으며 봉준호는 자신의 브랜드를 견고하게 만든다.

임필성: 봉준호가 각본으로 참여한 ‘남극일기’의 감독이자, 막역한 영화동료. 옴니버스영화 ‘인류멸망보고서’ 중 임필성 감독이 연출한 ‘멋진 신세계’에서 봉준호 감독은 시민단체 우익인사로 등장, 트레이드마크인 곱슬머리를 피고 개량 한복을 입은 채 기타를 친다. 이는 ‘괴물’에서 임필성 감독을 뚱게바라로 출연시켰던 것에 대한 일종의 보복성(?) 캐스팅으로 두 사람의 연기 품앗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을 즐기는 또 하나의 재미를 선사했다. ‘배우 봉준호’의 모습은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박찬욱이 프로듀서를 맡은 ‘미쓰 홍당무’에 주인공 양미숙(공효진)이 다니는 영어학원에서 함께 수업을 듣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등장했다. ‘살인의 추억’ 조명부 출신 강대희 감독의 단편영화 ‘불 좀 주소’에서는 한강 잠수교에서 자살하는 기타맨으로 우정 출연해 힘을 보탰다. 흥행 감독의 허례허식 없는 행보는 그의 영화 팬들로서는 반가운 일.

김혜자: ‘마더’ 속 마더. ‘마더’는 봉준호가 “어떤 아이디어가 있어서 ‘이걸 김혜자 선생님과 해볼까’, 이런 식이 아니라 외려 ‘김혜자 선생님과 꼭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데서 출발한 영화”다. 봉준호는 대학시절 자신의 영화동아리 ‘노란문’ 주변에서 살던 김혜자가 “화장실 가는 ‘간지’로 슬리퍼를 끌고 나와 주변에서 진행 중이던 촬영현장으로 가더니, 한두 시간 가볍게 찍고는 다시 그 걸음걸이로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고, 김혜자의 의외성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마더’를 만들었다. 봉준호는 김혜자가 갖고 있는 국민엄마의 얼굴에서 모성애의 또 다른 측면 즉 광기어린 모습을 찾아냈고, 김혜자는 ‘전원일기’의 어머니상과 완전히 배치되는 캐릭터를 통해 각종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 인생에 잊지 못할 순간을 맞는다. ‘마더’는 평단과 관객들로 하여금 여러 해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어쩌면 ‘설국열차’에 대한 전초전이었을 수도.

틸다 스윈튼: ‘설국열차’에 출연한, 세계가 인정하는 연기파 배우. 2011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칸을 찾은 봉준호는 ‘케빈에 대하여’로 역시 칸에 초대된 틸다 스윈튼을 만난다. 서로가 서로의 팬이었던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상대에 대한 호감표시를 아끼지 않았고, ‘뭐가 되건 같이 작품 하나 해보자’는 뜻을 공유한다. 틸다 스윈튼이 ‘설국열차’에서 맡은 메이슨 총리가 당초 시나리오에 남성으로 설정돼 있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 하지만 봉준호는 그녀를 캐스팅한 후에도 시나리오에 메이슨을 여자로 바꾸지 않았고, 틸다 스윈튼 역시 봉준호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영화는 국적과 성별과 피부색을 뛰어넘어 공동체 작업이라고 믿는 틸다 스윈튼과 영화 장르와 메시지의 구분 짓기를 경계하는 봉준호는 서로에게 더 없이 좋은 파트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히치콕인데 봉준호는 그와 비견할 만하다”는 소감은 세계적인 여배우 틸다 스윈튼이 봉준호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찬사. 봉준호의 다음 글로벌 프로젝트가 기대되는 이유.

크리스 에반스: ‘설국열차’의 주인공. ‘살인의 추억’과 ‘마더’의 팬인 크리스 에반스는 ‘설국열차’ 오디션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비를 들여 L.A.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 그 결과는? 크리스 에반스의 연기 인생은 ‘설국열차’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몸은 앞으로 돌진해가지만 정신은 죄의식 때문에 꼬리칸에 붙들려 있는 커티스”에게서 쫄쫄이 유니폼을 입고 하늘을 활강하는 미국의 캡틴 아메리카의 흔적은 없었다. 그만큼 봉준호는 기존 배우의 이미지를 전복시키고, 배우 안에 잠자고 있는 세포를 깨우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꽃미남 스타의 대명사였던 원빈이 바보 역할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 김혜자의 무거운 짐인 국민엄마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송강호: 봉준호가 “다른 차원의 연기를 선보이는 사람”이라고 극찬하는 배우. 봉준호는 ‘설국열차’ 시나리오가 완성되기도 전에 송강호를 찾아갔고, 송강호는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출연을 결정할 정도로 서로를 신뢰한다. ‘설국열차’의 주인공은 커티스지만 봉준호의 이상을 실어 나르는 건 남궁민수, 즉 그의 오랜 파트너인 송강호라는 건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미래의 지구가 배경인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점에서 ‘설국열차’는 봉준호의 이전 작품과는 다른 느낌을 품고 있으리라는 예상이 가능한 영화였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영화는 예상한 것 이상으로 봉준호의 것이라 불리는 것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한국의 특수한 지리적 분위기가 탈수된 자리에 봉준호가 구축한 것은 인류 보편의 정서. 이 과정에서 극한의 상황에서 역설적인 웃음을 만들어내는 ‘봉준호식 유머라든가, 장르영화를 지역정치학에 대입시켜 비틀어내는 ‘봉준호식 탈장르성’ 같은 것들이 희미해 진 건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온라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봉준호가 전작들에서 보여준 매력이 반감됐다’는 지적과 ‘봉 감독 작품에 새로운 지형이 탄생했다’는 팽팽한 싸움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논란이 봉준호이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호들갑스러운 반응 속에서 정작 봉준호 자신은 큰 흔들림이 없다는 점이다. “훗날 내 필모그래피를 쭉 보면 ‘설국열차’ 이전까지를 나의 초기작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 봉준호의 말 속에 그 힌트가 있다. 봉준호의 세계는 변화하고 있으며, 이제껏 그랬듯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 나갈 뿐이다. 그의 앞엔 어떤 문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Who is next

봉준호의 오랜 파트너 송강호와 ‘반칙왕’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호흡을 맞춘 신구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편집. 임지혜 a9840382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