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연애시대│2009 공포의 연애 9단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유행가 가사가 그토록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 지우고 고쳐 써야 할 만큼 어렵다는 전제에 다수의 대중이 공감했기 때문이리라. 특히 <결혼 못하는 남자>에 등장하는 두 남녀에게 사랑이란 프랑스어로 출제된 과학문제처럼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는 난수표다. 시청에서도, 전쟁터에서도, 사막에서도 사랑을 하는 보통 드라마의 주인공들과 달리 매일 마주치면서도 도무지 연애의 힌트를 찾지 못하는 두 주인공이 신장개업한 연애 상담소 ‘2번 팩토리’를 찾았다. 모두를 사랑하는 여자 상희와 모두의 사랑을 받는 활과 이들이 나눈 가상 대화를 공개한다. 혹시 당신도 이들과 같지는 않은지, 올 여름도 “안 생겨요”를 외치는 이들에게는 타산지석을 삼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장문정 : 대한민국에 맞선남 찍어내는 공장이 있나요?
강상희 : 응? 정말?
장문정 : 아니, 그만큼 맞선 자리에 나오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별로라구요. 남자의 의외의 모습을 발견할 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난번에 오소리 털옷 입고 나온 실용음악과 교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후지던지. 이제는 간호사들이 내 얼굴만 봐도 선보러 가는 줄 알겠다고 해요. 아버지는 어찌나 일방통행이신지 선만 봤다 하면 결혼 하라고 성화를 부리시고. 정말 너무 힘들어요.
강상희 : 아버지?
장문정 : 가족이라곤 달랑 둘 뿐인데 어쩌겠어요. 사위, 손주 없다고 칠순 잔치도 안한다고 하시고, 편찮으신 것도 내가 결혼해야 나을 병이라고 버티시는데 속상해 죽겠어요.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살고 싶진 않다구요. 지난번엔 우리 병원 환자한테 연락을 해서는, 세상에 둘이 찜질방까지 간 거 있죠. 얼마나 황당하던지.
강상희 : 오오~ 환자가 남자란 말씀?
장문정 : 저한테 치질 치료 받은 남잔데, 괴팍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불쑥불쑥 나타나서 사람 놀라게 하질 않나, 혼자 고기 먹으러 가고, 혼자 쇼핑하고 이상한 사람이라니까요. 되게 세련된 여자가 같이 다니는데, 여자 친구는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흥, 그럼 그렇지 그렇게 삐딱한 사람이랑 누가 연애를 하겠어요?
강상희 : 나쁜 남자구나?
장문정 : 꼭 나쁘다고 할 건 아니구요. 말본새가 삐딱해서 그렇지 근본은 여리고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강상희 : 응?
장문정 : 글쎄, 지난번엔 불꽃놀이 명당이 있다 길래 애들을 데리고 갔는데, 쌍안경을 두 개를 사 놨더라구요. 그거, 나한테 주려고 했던 거 맞겠죠? 또 한 번은 우리 아버지가 순대국 좋아하신다고 했더니 맛있는 집을 알아다 주더라구요. 그리고 그 사람 옷을 빌린 적 있는데 냄새가 되게 좋았어요.
강상희 : 그 남자랑 잤구나!

장문정 : 어머머머머머, 무슨 말씀이세요! 그 남자 독신주의자에요. 우리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악질, 반동, 반사회주의자. 게다가 자기 집에 한 발짝도 못 들어가게 하는데다가 나한테 물 쏟아 놓고는 사람보다 의자를 먼저 챙기는 그런 인간이라구요.
강상희 : 에이, 별로네. 이제 만나지 마.
장문정 : 그건 그렇지만. 그 사람이 의사 말은 듣지도 않을 거면서 자꾸 진료실에 오니까 아주 안보고 살 수도 없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 옆집에 친구가 사는데 그 집에 가다 보면 또 마주치고, 길에서도 마주치고….
강상희 : 뽀뽀는 했어?
장문정 : 어머머. 아까부터 왜 자꾸 그러세요!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옆에 있는 남자한테 일단 스킨십으로 어필하라, 뭐 그런 말씀이세요? 난요, 나이가 오십이든 육십이든 제가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결혼생활 하고 싶어요. 겨우 그런 사람 만나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게 아니라구요.
강상희 : 어… 난 조군 코에 항상 뽀뽀하고 싶던데, 언니는 그런 거 없어? 그리고 뽀뽀한다고 결혼 하는 거 아니야.
장문정 : 그건…… 그렇죠? 에휴, 내가 늙어서 그래요. 나도 내가 내 돈으로 아파트 분양 고려할 때까지 시집 못갈 줄은 상상도 못했었어요. 나이 때문에 결혼 정보업체에 52점 받고 입회 면접 봐야 하는 처지가 될 줄은 몰랐다구요. 요즘은 마사지를 해도, 실 면도를 해도 저만 아픈 거 같고, 보정 속옷에 돈을 쓰게 되고 그렇더라구요.
강상희 : 나는 돈 생기면 술 사 먹는데. 헤헤.
장문정 : 제가 벌어 놓은 거 다 줄게요. 그 청춘 나한테 조금만 팔래요?
강상희 : 정말? 팔까?

신활 : 안녕하십니까. 신활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신발을 벗었습니다. 고객님도 한 번 신발 끈을 느슨하게 묶어 보시죠. 단거리 선수는 신발 끈을 조이지만, 장거리 선수는 느슨하게 메는 법이죠. 피가 안 통하니까요. 연애를 할 때도 이렇게 마음을 조금만 풀어 주시면…
조재희 : 연애와 달리기가 같습니까? 전 동의 할 수 없군요.
신활 : 땀, 열정, 희망. 그런 것들이 연상시키는 심장 박동이 어쩐지 비슷하지 않습니까.
조재희 : 그건 수컷들의 판타지만큼이나 어이없는 비유로군요. 다만 제가 궁금한 건 한 가지뿐입니다.
신활 : 네. 물어 보시죠.
조재희 : 왜? 여자들은 당연한 사실을 말해줘도 마음 상하고 울거나 하는 겁니까.
신활 : 대체 뭐라고 하셨길래……
조재희 : 뭐, 별 건 아닙니다. 그저 술집 아르바이트 하는 친구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충고도 하고, 반올림해서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결혼도 안하고 있는 여자에게 녹슬어 간다는 현실을 직시하게끔 도와줬을 뿐인데.
신활 : 당신 안되겠구만. 여자한테 그걸 말이라고!
조재희 : 뭐요? 그러는 당신은 여자에게 상처 준 적 없습니까? 틀림없이 아내와는 신혼이 지나기 무섭게 사이가 소원해져 서로 각방을 쓴지 오래고, 그 덕분에 아직 자녀는 없으며, 동생이든 부모든 당신의 그 성격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겠죠.
신활 : 이봐,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정말 비열한 사람이구만.
조재희 :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제가 어렸을 때는 그렇게 순진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지금도 가족 병력으로 볼 때 내가 암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87퍼센트라서 암보험만 4개 든 사람입니다.
신활 : 좋기도 하겠습니다. 죽고 나면 보험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남겨진 사람들은…
조재희 : 집 팔고 보험료 정산 받고 요트 사서 바다로 나갈 겁니다. 아, 물론 그 전에 <지구의 청소부 느타리 버섯>, <쥬피터 코스모스 완결편>, <파르나르 박사의 상상>은 꼭 보고 떠날 겁니다. 반드시.
신활 : 왜 그렇게 사세요. 인생은 짧습니다. 불꽃놀이 같은 거예요.
조재희 : 아! 불꽃놀이. 그 원리를 아십니까? 빨간색은 스트론튬, 노란색은 나트륨을 연소 시킨 겁니다. 제가 아는 명당이 있는데, 최근에 그곳에서 장 선생님과 같이 불꽃 구경을 했었죠. 참 아름다운 구경이었는데.

신활 : 불꽃놀이를 같이 보는 여자라면 꽤 가까운 사이겠군요?
조재희 : 뭐, 썩. 내 담당 의사입니다. 혼자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티셔츠를 다림질 하고, 내 성역인 집에 자꾸 들어오려고 하는 아주 이상한 여자지요. 전체적으로 묘하게 꾸밈새는 좋은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은 똥그랗고 그렇습니다.
신활 : 전체적으로 무척 예쁘다는 말씀이시죠? 식사라도 같이 하시면서 얘기를 좀 나눠 보시죠. 그러시다보면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로 발전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조재희 : 전 혼자서도 잘 먹습니다.
신활 : 함께 하는 이 없는 식사는 늑대나 사자의 삶과 같다, 알랭 드 보통이 한 말이죠.
조재희 : 에피쿠로스의 문구를 알랭 드 보통이 재인용 한 겁니다. 아무튼 저는 여자에게 관심 없습니다. 가족도 싫습니다. 특상급 꽃등심이나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신활 : 혼자서요?
조재희 : 뭐 어떻습니까.
신활 : 휴우, 어련하시겠습니까. 전 순대국이나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조재희 : 제가 아주 맛있는 순대국집 아는데, 가르쳐 드릴까요? 구로시장 쪽으로 가시다가…
신활 : 그만 하시죠. 상담 시간 끝났습니다. 그만 가보시죠.
조재희 : 저… 그런데…
신활 : 짐 싸서 가시라구요.
조재희 : 그 테이블에 있는 컵이랑 접시. 안치우십니까? 당장 씻으십시오. 아니, 싱크대도 더럽고, 테이블도 다 닦아야겠군요. 그 걸레 이리 주십시오. 이렇게 지저분한 환경에서 어떻게 상담을 합니까. 에잇 에잇. 아, 그리고 이 가게 구조가 마음에 안듭니다. 이 벽이 시야를 가릴 뿐 아니라 테이블 위치가 동선을 방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