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인터뷰] ‘국가부도의 날’ 김혜수 “왜 IMF를 겪어야 했나…이제라도 알아야죠”

[텐아시아=김지원 기자]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역으로 열연한 배우 김혜수./사진제공=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비공개로 운영됐던 대책팀이 있었다는 기사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배우 김혜수는 이 이야기가 꼭 영화로 만들어지길 바랐다. 그는 “왜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었고, 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라는 아픈 시기를 지나와야 했는지 이유는 알아야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극 중 외환위기를 감지하고 대책을 세우려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역을 맡았다. 남성 중심적이었던 당시 정·재계에서 거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이자 소시민 편에 선 엘리트여서, 그의 고군분투가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김혜수가 한시현을 통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10. 외환위기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나?
김혜수: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인 이후 영화계에서는 오히려 경쾌하고 웃음을 주는 작품들이 많아졌던 것 같다. 다들 직간접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연이은 부도와 파산 소식을 들으며 잠재적 불안감을 느꼈다. 유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오거나 직접 돈을 벌면서 공부했다. 여유롭지 못한 상황에 값싼 음식을 사먹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강아지 캔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금모으기 운동도 기억 난다. 영화에 삽입된 화면 중에 ‘스스로를 비하하고 싶진 않으나 오늘은 실로 국치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앵커가 말하는 MBC 뉴스 장면은 실제로도 봤다.

10. IMF 사태를 겪으며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이 대다수다. 영화를 하면서 놓지 않으려 했던 부분은?
김혜수: 당시 상황을 치우치지 않게 그리면서 그 시대를 관통해낸 인물을 중점적으로 그리는 것, 아픈 시대를 소환하면서까지 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사진제공=영화사 집, CJ엔터테인먼트

10. 그 아픔을 들춰내면서까지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김혜수: 삶이 곤두박질치는 고통스러운 시기를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영화로 꼭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태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었고 왜 IMF라는 아픈 시기를 지나와야 했는지 그 이유는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극 중 인물들은 가상이지만 협상 내용은 가공된 게 아니다. 시나리오를 보고 당시 협상 내용을 알게 됐는데 충격이 컸다.

10. 경제 이야기라 어렵게 느낄 관객들도 있을 것 같다.
김혜수: 평소 접하기 어려운 단어들로 구성된 대사가 많다. 딱딱한 용어로 진심을 드러낼 수 있을까, 역할을 맡은 나도 이해하기 힘든데 관객들이 따라와 줄 수 있을까 걱정했다. 경제전문가인 한시현을 연기하기 위해 경제용어에 대한 부담감을 없애는 과정이 필요했다. 대사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관객들이 더 쉽게 감지할 수 있는 용어나 평상시 쓰는 말로 바꿨다. 영어 대사도 마찬가지다.

10. 극 중 시현은 왜 그렇게까지 간절한가?
김혜수: 시현은 부당함에 맞서고 할 말을 다 하는 성격이다. 여러 면모가 있겠지만 나는 자신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는 면모를 강조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대립하고 부딪히는 상황들이 생기는 거다. 협상장에서는 자신의 직위에서 지켜야할 선을 넘기도 한다.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일의 내막을 알고 있는 전문가로서, 그에게는 절대 넘길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시현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래서 여느 기득권층과 달리 평범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담담하고 묵묵하게 직무에 최선을 다한다. 시현이 자신의 가족도 IMF 위기 사태에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에서 에센스처럼 응축된 감정이 표출되길 바랐다.

김혜수는 ‘국가부도의 날’을 찍으며 자신의 신념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사진제공=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10. 시현은 외환위기를 감지하고 IMF 구제 금융을 막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하지만 재정국 차관(조우진)과 종금사 출신 윤정학(유아인)은 위기를 이용하려 한다. 실제로 영화 같은 상황이라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 같나?
김혜수: 차관이나 정학이 악인은 아닌 것 같다. 그들도 살아오면서 형성된 나름의 신념과 원칙이 있을 것이고 그걸 지키려는 것이다. 만약 영화와 같은 상황이 온다면 나도 몰랐던 내 신념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를 시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정학이 가진 것 같은 욕망이 있을 수도 있다. 정학처럼 뛰어난 경제 감각이 없음을 한탄할 지도 모른다. 인간은 흔들리는 존재이지 않은가. 정직하게 말한다면 나도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어떤 선택들을 하며 살아왔는가’ ‘나는 어떤 인간이길 지향하는가’ 등을 고민하게 됐다.

10. 조우진은 배역에 높은 몰입도를 보여줬다. 어떤 배우인가?
김혜수: 조우진은 진중하고 따뜻하다. 연기에 천재적이면서도 작품 준비 또한 철두철미하다. 자기 자신이 잘 한다는 걸 알 텐데도 스스로 경계한다. 실력 있는 배우와 일하는 건 내게도 좋은 자극이 된다. ‘IMF 가면 안 된다’고 반박하는 장면에서는 조우진 씨가 연기를 너무 잘하다 보니 실제로 치가 떨려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 상황을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그 모습은 쓰지 말아달라고 했다.

10. 유아인과는 2007년 개봉한 영화 ‘좋지 아니한가’에 함께 출연한 후 오랜 만에 만난 것 같은데.
김혜수: 아인에게는 애정이 간다. 여러 연기를 시도하면서 잘 성장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다. 대본을 보고 정학 역을 연기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인이 한다고 해서 기대됐다. 젊고 에너지가 충만하고 재능 있다. 연기 외에도 매력이 많다. 그 또래에서 비교 불가할 만큼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나가는 배우다.

10. 프랑스의 유명 배우 뱅상 카셀이 IMF 총재 역을 맡아 화제가 됐다. 함께 연기한 소감은?
김혜수: 다른 문화권에서 입지를 갖춘 배우와 공식적으로 함께할 기회가 생긴 것은 행운이다. 실제로 그와의 촬영은 숨 막히는 3일이었다. 제대로 갖춰진 배우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환기하게 됐다.

김혜수는 “삶이 곤두박질치는 고통스러운 시기를 이야기하고 있다”면서 “왜 우리가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사진제공=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10. 극 중 인물들이 직접 만나는 장면이 거의 없다는 점이 독특하다.
김혜수: 각 인물들에게는 독자적인 구성원들이 있다. 시현은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원, 정학은 투자자들, 갑수(허준호)는 공장 직원들과 가족. ‘따로 또 같이’인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각자의 이야기가 이질감 없이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로 인해 중요한 것이 덜 보이거나 불필요한 것이 지나치게 드러나진 않을지 두려웠다. 시현이 거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라는 점 때문에 톤이 튀지 않을지도 걱정했다. 다행히 보는 이들이 불편하지 않게 만들어진 것 같다.

10. 남성 캐릭터들 사이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는?
김혜수: 시현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크게 상관은 없다고 본다. 시현은 자신의 일에 소임을 다하는 사람이고, 그가 여성인 것뿐이다. 당시 남성 중심의 권력구조에서 여성으로 겪어야 했던 분투를 굳이 부각하려고 하진 않았다. 이미 극 중 인물들의 언행으로 드러난다. 우리 영화의 제작자와 현장 PD도 여성이다. 하지만 ‘기가 막힌 여성캐릭터를 만들자’고 얘기한 적은 없다. 그래도 나름 괜찮은 여성캐릭터가 남게 된 것 같다. 이런 캐릭터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10.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김혜수: 시사회 때 초등학생인 조카가 왔다. 어려운 내용일 수도 있지 않나. 어땠느냐고 물어봤더니 ‘영화를 보기 전에 IMF에 대해 찾아보고 왔다. 좀 어려웠는데 모르는 건 아빠한테 물어보면서 봤다. 친구들과 또 볼 거다’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그 시대를 관통해왔고, 모르고 성장한 세대도 있다. 다양한 계층, 여러 시각으로 외환위기 사태에 대해 되돌아봤으면 한다.

김지원 기자 bella@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