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인칭 관찰자 시점] ‘툴리’, 엄마를 쓰다듬고 품다

[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영화 ‘툴리’ 스틸컷

으아앙!

지금도 길을 걷다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멈칫하고야 만다. 온몸의 힘이 주르륵 빠지면서 혼자서 동동거리던 육아기로 소환된다. 첫애는 잠투정도 심했고, 모유 수유도 했던 터라 밤에는 띄어쓰기가 있는 잠을 근근이 이어갔다. 첫돌이 될 때까지도 ‘띄어쓰기 수면’은 진행 중이어서 늘 잠이 고팠다. 산후 우울증으로 불쑥불쑥 슬픔이 찾아들어서 감정적으로도 고팠다.

차가운 겨울밤, 서늘한 윗목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듯 했다. 심장을 채우던 문장 부호들이 뿌리째 뽑힌 듯 싶었다. 나날이 아기는 참 이뻐지고, 엄마인 나는 참 안 이쁘던 시절이었다.

신발 하나를 못 챙기는 첫째 사라(리아 프랭클랜드), 정서 발달에 문제가 있는 둘째 조나(애셔 마일스 팔라카), 계획에 없던 막내 딸 미아, 그리고 출장이 잦고 퇴근하면 게임으로 좀비를 죽이다가 기절하듯 쓰러지는 남편 드류(론 리빙스턴).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는 독박 육아에 허덕이고 있다. 그녀의 오빠 크레이그(마크 듀플라스)는 생기가 없어진 여동생을 보노라면, 마치 몇 년 전에 동생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보다 못한 크레이크는 마를로의 육아를 덜어줄 야간 보모를 셋째 출산 선물로 제안한다. 세 명의 새엄마 밑에서 성장한 마를로는 남의 손에 아기를 맡기는 것을 저어하지만, 결국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를 부르게 된다. 좀 희한한 20대 보모로만 여겼던 툴리의 등장이 마를로의 일상에 차츰 변화를 일군다. 처음으로 꿀잠을 자고, 곱게 화장도 하고, 냉동 피자가 아닌 로스트 치킨을 만들고, 사라와 조나하고도 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툴리와 속 깊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마를로에게 툴리는 큰 의지처가 된다.

“20대는 꿈만 같죠. 그러다 새벽 쓰레기차처럼 30대가 찾아와요. 엉덩이와 발이 임신할 때마다 반 사이즈씩 커지고, 자유로운 영혼도 매력이 사라져요.”

마를로가 툴리에게 하는 이 말은 많은 여성, 많은 엄마의 마음을 대신한다. ‘주노’ ‘영 어덜트’에 이어 ‘툴리’로 다시 만난 제이슨 라이트맨 감독과 디아블로 코디 작가는 전작처럼 여성의 이야기를 길어 올렸다. 번득이는 대사가 장기인 작가와 따스하게 감싸는 연출이 특기인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특히 정교하고 미려한 앙상블을 선보였다. 샤를리즈 테론은 역할을 위해 무려 22kg을 늘렸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체중이 아니라 캐릭터를 키웠다. 그녀의 느른한 눈빛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저몄다.

마를로의 아침은 아이들과 씨름을 하다 보면 폭풍처럼 쓸려간다. 만삭의 몸이 누릴 작은 호사로 디카페인 저지방 라떼 한 잔을 마시려 해도, 곁에서는 임산부를 향한 곱지 않은 말이 쏟아진다. 그래도 아직은 지친 일상에 유머를 얹을 수가 있다. 셋째를 출산하고, 밤낮없는 쳇바퀴 육아가 시작되면서 밭은 유머로 버티던 그녀의 일상을 앗아간다. 육아의 고단함은 삶의 고단함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마를로는 조나가 흘린 음료로 티셔츠가 젖자 꾸역꾸역 옷을 벗고는 속옷 차림 그대로 우두커니 앉아있다. 사라는 그녀의 푹 퍼진 몸을 보며 말한다. “엄마, 몸이 왜 그래?” 참 얼얼한 질문임에도 대꾸할 기력마저 없는 마를로의 모습은 저릿하다. 그녀는 그저 스스로에게 화풀이를 하고, 스스로를 방치한다. 툴리는 이런 그녀에게 극진한 말을 건넨다. 당신은 참 좋은 엄마이고, 아이 뿐 아니라 당신을 돌보러 왔노라고. 자신의 마음을 쓰다듬는 툴리 덕분에 마를로는 무채색이던 일상에서 어렴풋이 색깔이 보이기 시작한다.

‘툴리’를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제목이 겹겹이 다가온다. 육아에 지쳐서 몸도 마음도 뚝뚝 녹아내린 엄마들을 쓰다듬고 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치유되지 않아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컨실러 범벅이죠.” 작가의 섬세한 공감력으로 빚어낸 대사는 온 마음으로 스며들었다. 불현듯 아들이 8살 무렵 나에게 썼던 생일 카드가 떠올랐다.

‘엄마, 생일 축하해. 엄마가 생일에는 조금 쉬는 게 좋겠어. 그러니까 아빠한테 부탁을 해봐. 엄마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사랑해.’

아들의 곰살맞은 정이 촉촉하게 묻어나는 카드를 읽다가 조금 쉬는 게 좋겠다는 구절에서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가슴 한 귀퉁이가 시큰했다. 나를 품고 쓰다듬는 한마디였다. 그해 최고의 선물이었다.

11월 22일 개봉. 15세 관람가.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