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인터뷰] ‘출국’ 이범수 “논란도, 이념도 뛰어넘는 건 ‘부성애’라는 진정성”

[텐아시아=김지원 기자]

영화 ‘출국’에서 가족들을 되찾기 위해 사투하는 영민 역으로 열연한 배우 이범수. /사진제공=디씨드

영화 ‘출국’의 주인공 영민의 삶은 기구하다. 남한에서 태어났지만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단체 활동으로 인해 입국금지를 당하자 서독으로 망명한다. 그는 학문에 대한 열망이 높은 마르크스 경제학자다. 남북한의 이념 대립이 첨예하던 1980년대, 그의 학문은 남한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분단의 도시 베를린에서 영민은 북한 고위층의 은밀한 제안에 넘어간다. 학자로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게 도와줄테니 월북하라는 것. 영민은 가족들을 데리고 월북하지만 원치도 않았던 공작원 교육을 받게 된다.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다시 서독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유럽의 한 공항에서 스파이로 붙잡히고, 혼란을 틈타 북한 요원들은 그의 아내와 둘째 딸을 잡아간다. 이들을 구하려고 분투하던 중 첫째 딸마저 북한 요원들에게 납치된다.

영민을 연기한 이범수는 “오랜 만에 연기력만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오영민이라는 아빠의 변화, 갈등, 번민, 슬픔 등 세심한 감정으로 극을 이끌 수 있는 작품을 만나 욕심 났다”며 “남 주기 아까운 작품”이었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또한 “부성애, 가족애, 아빠의 처절한 사투”로 영화를 소개했다.

이범수는 화이트리스트 논란에 대해 “오해”라며 “진정성 있는 영화”임을 강조했다. /사진제공=디씨드

‘출국’의 개봉은 순탄치 않았다. 박근혜 정부 때 제작비 지원 사업에서 상대적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에 휩싸였고, 배급사도 바뀌게 됐다. 이범수는 화이트리스트 논란에 대해 “오해”라며 “그런 논란도 후반작업 때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밝혀질 것이고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신인 감독의 작품이라 못 미덥다는 시선도 받아야 했다. 이범수는 “불안한 점도 있지만, 신인이기에 때 묻지 않고 도전적이고 과감하고 참신했다”고 말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범수가 이 영화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건 ‘진정성’ 때문이었다.

“자극적이고 쾌감을 주는 영화가 많은 때에 모처럼 진정성 있는 영화를 만났습니다. 시나리오를 읽고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느꼈어요. 자극적인 소설을 읽다가 순수한 수필집을 만난 듯한 느낌이었죠. 배우에게 중요한 건 시나리오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입니다. 이것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어떤 울림을 줄지, 연기로 구현해낼 때 내가 얼마만큼 섬세하게 감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로 접근해야죠.”

극 중 영민은 납치된 아내와 두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서독과 동독의 경계를 넘고, 북한 요원들의 아지트로 무작정 쳐들어가기도 한다. 그런 영민의 모습이 할리우드 영화 ‘테이큰’을 연상시킨다. ‘테이큰’에서는 전직 특수요원인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테이큰’처럼 나오면 안된다고 마인드컨트롤을 했어요. 촬영하면서도 계속 고민했고 감독님께도 여러 번 어필했죠. 공부만 할 줄 아는 샌님 같은 아빠가 가족을 찾겠다고 날뛰게 되는 게 변화의 폭이 더 크지 않습니까. 형광등도 못 갈아 끼우던 사람이 태권도 10단 유단자처럼 잘 싸우면 오히려 이상하잖아요. 가족을 구하겠다는 집념으로 의욕이 앞서는데 싸움은 못하죠. 액션의 수위를 잘 조절하려 했어요.”

영화 ‘출국’의 한 장면. /사진제공=디씨드

촬영은 1980년대 중반 동유럽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국내와 폴란드를 넘나들었다. 이범수는 “현지 스태프들이 한국 촬영팀 수준에 놀라워했다”며 자랑했다.

“촬영 수개월 전 테이블에서 짰던 계획에 맞게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됐어요. 몸살, 감기를 앓는 것조차 예의가 없는 일이죠. 반팔을 입다가 며칠 만에 패딩을 입어야 할 만큼 곧장 추워져서 다들 고생했어요. 계획표대로 가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 하루하루 퍼즐을 맞추는 기쁨이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다음날로 미뤄지는 것 없이 잘했다는 성취감 같은 거죠.”

함께 연기한 배우 연우진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연우진은 극 중 서독에서 활동하는 남한 국가안전기획부 요원 무혁 역을 맡았다. 영민을 감시해야 하는 하지만 남몰래 그를 돕는다. 이범수는 연우진에 대해 “더욱 잘 될 것이고 미래가 기대된다”고 칭찬했다.

“우진이와 첫 촬영이 다리 위에서 제가 멱살 잡히는 장면이었어요. 멱살 잡힌 부분이 아파서 살짝 봤더니 멍이 들었더라고요. 제가 살피는 걸 우진이가 봤나봐요. 촬영이 끝나고 연고를 구해와서 주더라고요. 저도 예전에 멱살을 잡는 역할을 했을 텐데 그 때 그 상대배우에게 연고 한 번 드릴 생각은 미처 못했거든요. 온정이 있는 친구구나 싶었죠. 지금도 그 연고를 아껴 바르고 있어요. 효과도 좋아요. 하하.”

이범수는 배우라는 직업을 “무형무색”이라고 표현했다. 코믹, 멜로, 액션 등 ‘그릇’에 따라 담기는 모양도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사진제공=디씨드

이범수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소련 유학파 출신 공산주의자 역으로 냉철하고 살벌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선한 역할이 그리웠느냐고 묻자 “합법적으로 악행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악역도 아주 재밌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코믹하거나 악하거나 다정하거나… 신인 때부터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지는 걸 많이 경계했습니다. 저는 ‘순수’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 색깔에 이 모양을 담으면 이 느낌이 나고, 저 색깔에 저 모양을 담으면 저 느낌이 나는 ‘무형무색’이요. 19살 때부터 그렇게 배웠고, 그게 지금껏 머리를 떠나지 않네요. 감동적인 휴머니즘 스토리를 보여주면서도 코믹이 하고 싶어 근질근질해요. 사람이 어떻게 맨날 양복만 입겠어요. 일요일엔 운동복도 입고 잘 때는 잠옷도 입는 거죠. 하하.”

이범수가 이번 영화를 선택한 건 무엇보다 아버지로서 극 중 영민와 감정적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딸과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땐 신기했어요. 그것보다 경이로운 건 태어난 아이가 성장하면서 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겁니다. 말을 배우고 소통하고 장난도 치면서 관계가 형성되고 정이 들죠. 그게 놀랍습니다. 두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에 영화에서도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이나 상황들에 좀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지 묻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바보가 될까봐 (말을 못하겠다)”며 진짜 ‘아빠 미소’를 한가득 머금었다.

김지원 기자 bella@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