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일 “나 같은 음악이 있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정재일은 얽힌 사람과 이야기가 많은 뮤지션이다. 이적과 윤상을 비롯한 뮤지션들은 그를 곁에 없어선 안 될 뮤지션으로 꼽고, 정인, 에픽하이, 김동률, 엄정화, 윤상, 패닉 등의 앨범에 작곡가, 편곡가 혹은 연주자로 함께 했다. 그런 그가 지난 10월 23일, 자신의 세 번째 앨범 < Incendies (엥셍디)>를 발표했다. 동시에 3년간 준비해 온 전시 ‘The Moments’가 최근 막을 올렸고, 음악 감독으로서 작업한 연극 <더 복서>도 현재 대학로에서 공연 중이다. 음악을 시작한지 10여 년, 스스로의 앨범을 내는 것에는 인색했던 그에게 < Incendies >와 자신의 이름을 건 전시회는 어떤 의미일까. 그를 정말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래서다. ‘천재 뮤지션’이나 ‘누군가의 편곡가’라는 수식을 모두 벗고 지금 당장 자신의 앨범 발표와 전시, 연극 음악 모두를 해내고 있는 아티스트 정재일이 그리는, 그의 진짜 그림이 궁금했다.

 

2년 만의 앨범이다. 연극 <그을린 사랑>을 위해 작업한 음악들을 이번 앨범 < Incendies >로 묶어서 냈는데, 이를 정규앨범이라고 봐도 괜찮은가.
정재일: 사실 정규앨범이라는 생각으로 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이름으로 낸 앨범 중에 가장 피드백이 많은 상태라 의도치 않게 나에게 좀 중요한 앨범이 되어 버렸다. (웃음)

그간 해온 여러 연극 음악 작업 중에서도 <그을린 사랑> 작업을 앨범으로 내게 된 이유가 있나.
정재일: 작품 자체에 애착이 있었다. 연극이 원작이라는 것도 몰랐던 때에 영화를 먼저 봤는데 정말 좋았다. 그 후, <그을린 사랑>의 작업 제안을 받고 텍스트를 보자마자 작품이 가진 힘에 강하게 끌렸다. 연극이 끝난 뒤에 런던으로 가서 지냈는데 거기서 가만히 이 음악들을 듣고 있자니 이것들을 가지고 연극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앨범 재킷에 쓰여 있는 문장이 연극의 대사인데, 이 한 줄의 대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다시 만들어보고 싶었다. 연극에서 쓰인 것과는 다르게 조율하고 배치해서 앨범을 냈다.
“‘Covered’는 극장 객석에까지 불이 다 켜진 듯한 느낌”

AS10tHDbAEadeoK

그 한 줄 대사, ‘There are truths that can only be revealed when they have been discovered’를 어절 단위로 나누어서 각 트랙의 제목으로 붙였다.
정재일: <그을린 사랑>은 하나의 대서사시 같다.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사건을 말로 계속 풀어나가는데 한 줄, 한 줄이 모두 시 같다. 어머니가 왜 침묵했고, 왜 남매로 하여금 이 사실을 추적하도록 만들었는지가 결국 그 한 문장에서 다 끝나더라. 그래서 선택했다. 안무가 피나 바우쉬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의 작품을 보면 여러 이미지가 계속 떠오르다가 마지막에 어떤 음악 혹은 침묵에 의해서 공연의 감정 선이 ‘팍’ 하고 터져버릴 때가 있다. 나는 그 한 줄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강렬했다.

조율과 배치를 새로 해서 연극에 쓰인 음악들을 재조합하고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점에서 지배적으로 가졌던 심상이 있나.
정재일: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전체적으로 하염없이 조용하고 어둡다. 그런데 마지막 곡인 ‘Covered’는 역시 공허하긴 마찬가지지만 앞의 곡들과는 달리 조금 밝다. 이게 나한텐 좀 중요했다. 연극에선 비가 내리는데 하늘은 밝아지는 장면이다. 인물들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됐고, 그렇다면 이다음에는 무엇이 오게 될까 생각했다. 어두우면 안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너무 밝게 “자, 가자!” 하는 느낌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Covered’를, 극장으로 치면 객석에까지 불이 다 켜진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작업했다.

개별적인 곡들이 이어지면서 어떤 공간이나 분위기를 형성하도록 신경 쓴 것인가.
정재일: 어떤 공간을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염두에 뒀다. 나는 그게 정말 중요하다. 내가 감동받은 것들이 다 그런 것들이니까. 단어들을 곡마다 붙여서 배치한 것도 이들이 모여 한 문장이 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CD 하나를 한 작품으로 들어주십사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을린 사랑> 외에 현재 학전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더 복서>를 비롯한 학전의 아동극 음악 작업도 계속 해왔다.
정재일: 학전을 이끄시는 아티스트 김민기는 나의 우상이기 때문에 부르시면 무조건 간다. (웃음) 선생님이 2005년쯤에 아동극을 시작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 마침 나는 ‘푸리’라는 밴드로 일본 전국 투어를 할 때 그걸 연출해주신 분이 일본 연극의 대부 격인 분이었다. 상업 뮤지컬도 많이 하시던 분이었는데 돌연 모두 접으시고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들을 위한 연극을 하시기 시작했다. 이 분을 뵙고 이야기를 들었을 무렵 김민기 선생님이 아동극을 시작하신다는 말을 들은 것이어서 ‘아이들을 위한 연극에 뭔가가 있나 보다’ 싶고 궁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르시면 가야하니까. (웃음) 처음 작업했던 아동극이 <고추장 떡볶이>였는데 악사로도 참여했던 작품이다. 아이들의 동작을 따라가면서도 연주했는데, 아이들이 뛰어가면 “우루릉~” 하는 소리를 내는 식이었다. 즉흥적으로 소리를 넣었다, 뺐다 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더라.

어린이들과 함께 피드백을 주고 받는 음악 작업이라 색다른 매력이 느껴질 것 같다.
정재일: 어른들은 학습에 의해서 음악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불협화음을 들으면 불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그런데 아이들은 불협화음이건 협화음이건 큰 상관이 없다. 그 공간에, 바로 그 때 그 음악이 주는 감정이 제일 중요한 감상이 된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 ‘아, 이건 클래식. 이건 불협화음’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아이들은 안 그런 것 같더라. 바로바로 그 정서에 반응한다. 그 점이 나에겐 또 하나의 매력이다.
“피나 바우쉬를 알게 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AS10FY1J5Kbct3S7u4C9P2zEK

오는 18일까지 가회동 원앤제이 갤러리에서 장민승 작가와 함께 작업한 전시 ‘The Moments’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재일: 바다 사진인데 멀리서 보면 그냥 그림 같지만 가까이 보면 파도 같기도 한 작업도 있고, 사진과 음악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고 조명을 함께 설치했다. 빛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효과를 줘서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작품들이다. 세 개의 전시 공간으로 되어있고, 각각의 공간에 한 사람만 들어가 감상한다. 암전된 공간에 헤드폰이랑 스포트라이트가 있는데 그 헤드폰을 들면 음악이 시작되면서 스포트라이트가 사진을 비추는 방식이다.

음악 작업을 할 때 조명의 효과까지 모두 생각하고 조율했겠다.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며 완성했나.
정재일: 장민승 작가가 그의 외조모님께서 선종하시고 난 뒤, 매일 밤 성모마리아 상 앞에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 때 촛불에 따라서 성모마리아 상의 표정이 달라지는 걸 경험했는데, 그에 착안해서 아주 사적인, 혼자만 있는 공간에서 빛에 의해 사진을 보고 음악을 듣는 작품을 생각했다. 사실 3년 전부터 계속 이를 위한 음악을 만들어 왔고 녹음도 진행해 왔다. 꾸준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군대 가서도 편지로 계속 대화했고, 장민승 작가가 바다 사진 찍으러 갈 때도 쫓아 다녔다. 태풍 볼라벤이 왔을 때는 제주도로 날아가 하루 종일 파도를 찍었다. 바위에 매달려서… (웃음)

연극이나 전시, 음악 모두 그 순간의 에너지와 전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심상을 생각해서 종합적으로 구상을 해야 할 텐데.
정재일: 공연 예술, 그 중에서도 무용을 정말 좋아한다. 이런 작업을 하게 된 아주 중요한 계기가 2000년에 피나 바우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내 인생이 다 바뀌었다. 그때 받은 인상에 대해서는 말로 이야기하기가 너무 힘들 정도다. <카네이션>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예술에서 그런 감정을 겪어 본적이 그 전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음악에 대한 생각이 변했다. 음악이 얼마나 나에게 중요하고 다른 예술에서도 중요한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됐다. 요즘엔 MP3에 음악을 담아 듣거나 동영상 파일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 친숙해지면서 점점 그 순간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약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공연장은 어쨌든 들어가서 중간에 나오기도 쉽지 않다. (웃음) 순간에 집중을 하게 만드는 것인데, 나는 그런 순간들에서 감동을 느낀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니까.
정재일: 맞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에 올린 전시 제목도 ‘The Moments’로 지은 것이었다.

전시와 이번 앨범을 통틀어 생각해보면 ‘순간’이라는 것에 몰입하면서도 나름의 내러티브나 서사를 뚜렷이 전달하고 싶은 것 같다.
정재일: 대부분 CD를 사서 자신만의 분위기에서 듣겠지만, 나는 내가 생각한 모든 것을 다 만들어서 그 공간 자체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리하여 감동이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전까진 정재일의 이름을 건 앨범을 내거나 패닉, 윤상 등 여러 뮤지션들의 편곡을 하는 등 음악 자체에 해당하는 작업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계속해서 전시나 연극음악 등 다른 예술들과 결합된 형태의 작업을 하고 있다.
정재일: 대중음악이 아닌 음악을 오래전부터 계속 해오긴 했다. 근데 해보니까, 이건 정말 열심히 해도 티가 안 난다. 전시를 10번을 해도 그냥 윤상 프로듀스 한 번 하는 걸 사람들은 훨씬 많이 안다. (웃음)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라, 대중음악 작업에서는 돈을 벌 수 있고 이쪽은 그걸 쏟아 부어서 해야 하는 작업들이 많다. 물론 대중음악도 재미있지만 마음이 이쪽에 좀 더 기울어 있으면서도 두 가지가 항상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두 가지를 분리하는 게 두 작업을 모두 지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겠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구분해내는 게 쉽진 않았을 것 같다.
정재일: 만약 둘 중에 내가 마음이 더 기울어 있는 쪽만 하게 되거나, 해야 한다면 생계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 작업을 일로서 할 텐데 그럼 순수하게 해나가야 하는 부분을 해치게 될 수도 있다.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이렇게 구분이 됐다. ‘나는 대중음악도 잘 할 수 있으니까, 그냥 같이 가자’ 싶었다. (웃음) 한 쪽에서 슈퍼스타가 되지 않는 이상 두 가지가 영원히 같이 갈 것 같다.
“박효신과 윤상 앨범도 계획되어 있다”

AS10lMrrlwGnTi2lbtahN4eAMfWWiFU

전시나 연극 음악 등의 작업과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작업이나 본인의 솔로 앨범을 작업하는 것에 대해선 어떤 차이점을 느끼나.
정재일: 다른 뮤지션들과의 작업을 할 땐 어쨌든 난 조력자다. 이 아티스트가 빛날 것을 신경 쓰는 반면 전시나 연극 음악들의 경우, 물론 다른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음악을 만들게 되지만 그래도 온전히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아무래도 전시나 연극 음악을 좀 더 ‘정재일 음악’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고되긴 하지만 더 재밌다.

지금 유행하는 대중음악들은 지나치게 트렌디하거나, 가벼운 소리를 가진 것들이 많다. 대중음악 편곡자로서 그런 부분에 있어 고민되는 부분은 없나.
정재일: 그쪽은 아예 생각도 안 한다. 예를 들면, 요즘 잘 나가는 싸이나 Will. I. Am, 소녀시대의 음악 쪽의 재능이 나에게는 없는 것 같다. 그 음악들을 굉장히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만들기엔 힘든 정서들과 표현 방식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몰라서 그것들을 잘 해낼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괴리나 고민은 없다. 그런 음악에 대해서는 그냥 듣는 사람의 입장으로 좋아할 뿐이고, 나는 어느 정도 클래시컬한 바탕에 있는 대중음악들만 하고 있다.

싸이나 소녀시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중음악 작업에 있어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갈등은 없나.
정재일: 그런 이야기 정말 많이 들었다. 그렇게 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감동을 받는 것들이 그런 게 아니다. 압도적이고 좀 익숙하지 않아도 새롭고, 좀 깊고 오래갈 수 있는 방식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그렇지 않게 작업하는 것은 잘 못하겠다. 흥을 돋우고 귀를 한 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있지 않나. 그것과 다른 쪽에, 나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음악도 있는 것이 재밌지 않을까.

대중 음악가들이 편곡자 정재일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그런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정재일: 어렸을 때는 아티스트와 상관없이 무대에서 좀 강력하게 연주할 수 있거나 새로운 것에 중점을 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Radio Head나 Bjork의 음악을 들었을 때 느꼈던 것들을 나도 만들고 싶었거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게 아닌 것 같더라. 프로듀스 했던 패닉 4집을 한참 후에 다시 들으니 내가 이적과 김진표를 생각하지 않고 너무 내 마음대로 해놨더라. 그 이후부턴 무조건 아티스트가 중심이다. 어떻게 하면 이 아티스트가 빛날까만 생각한다.

‘The Moments’ 전시 이후에 계획해둔 작업들은 무엇인가.
정재일: 12월에 국립국악관현악단과 ‘카입’이라는 분과 함께 새로운 곡을 올릴 예정이다. 그리고 김민기 선생님이 하는 것 전부 다 해야 된다. (웃음) 무대 미술 하는 여신동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요즘 뭔가를 꾸미고 있다. 그걸 함께 하기로 한 상태이고, 박효신과 윤상 앨범도 계획되어 있다.

정말 이제는 본격적으로 두 갈래의 작업을 같이 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정재일: 맞다. 쭉 같이 해나가야지. 계속. 그리고 언젠가는 이 둘이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