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종영] 로맨스 빠진 서현의 ‘시간’, 그래서 멋졌다

[텐아시아=유청희 기자]

사진=MBC 수목드라마 ‘시간’ 방송 캡처

지난 20일 종영한 드라마 ‘시간’은 조그마한 눈뭉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스노우볼 효과’를 떠올리게 한다. 재벌가의 호텔 수영장에서 한 여성이 죽었다. 이름은 설지은(윤지원). 직접 사인은 익사로, 특별히 누군가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은폐된 진실은 점점 눈덩이처럼 그 다음 죽음을 만들어나갔고, 사회는 가난한 대학생이자 간헐적 성매매 종사자였던 설지은을 또 한 번 죽이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시간’은 그런 악행의 작동방식을 막기 위한 유가족 설지현(서현)의 분투를 담은 듯했다. ‘내 동생이 죽은 이유를 알고 싶다’는 당연한 열망은 재벌가의 비리와 언론의 적폐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갔다. 방송 초 단순한 ‘캔디형 여주인공’이었던 설지현은 마지막 회를 앞두고는 스마트폰을 들고 거리로 나갔다. 천 회장의 비리를 폭로하기 위한 실시간 SNS 라이브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사진=MBC 수목드라마 ‘시간’ 방송 캡처

이날 방송된 ‘시간’ 29~32회(마지막 회)에서는 신민석(김준한)이 설지현을 총으로 쏜 이후가 펼쳐졌다. 천 회장에게 100억을 받은 뒤 지현을 총으로 쐈던 것은 배신이 아니라 사전에 지현, 은채아(황승언)와 함께 짜둔 각본이었음이 드러났다. 회장의 악행에 대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총알이 방탄조끼를 벗어나 지현의 어깨로 향해지현은 큰 부상을 입었고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100억과 신분 세탁’의 기회를 얻은 자신의 오랜 연인이자 배신자인 신민석을 향한 정당한 의심이었다.

채아는 지현을 물질적으로 도와줬지만, 지현은 계속 의심했다. 실제로 채아는 신민석을 도와줘 그를 떠날 수 있게 만들었다. 천수호(김정현)의 죽음을 이유를 밝히려던 열망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 앞에서 흔들렸다. 

이에 지현은 ‘선택’의 판을 깔았다. 천 회장의 총격 지시 영상이 담긴 USB를 채아에게 건내며 “복사본은 따로 있다. 자정까지 믿을 만한 언론에 제보하지 않으면 내가 폭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밤 12시에 지현은 인터넷에 영상을 올렸다. 영상은 일파만파로 퍼졌지만 곧이어 ‘조작이 의심된다’ ‘조작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각종 영상, 사운드 전문가들의 멘트가 언론을 장식했다.

또 한 번 낙심한 지현에게 복규(조병규)는 ‘천 회장의 비리 장부’에 대한 언급을 했고, 지현은 다시 힘을 냈다. 지현은 ‘비리 장부를 찾으면 1억 원을 주겠다’는 이벤트를 열어 사람들의 관심을 동원했다. 이후 SNS 방송을 예고한 지현은 한밤중 거리로 나갔다. 그는 스마트폰에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얘기를 하려 한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진=MBC 수목드라마 ‘시간’ 방송 캡처

영상을 본 천 회장과, 천수철 등 재벌 일가가 몰려들었다. 채아는 한자리에 서서 죄를 고백했다. 이후 이들은 법정에 섰다. 계속된 천 회장과 변호사의 물타기에 지현은 밀릴 뻔 했지만, 100억을 들고 사라졌던 신민석이 법정에 들어오면서 판도는 뒤집혔다. 사건을 은폐하고 사주했던 천 회장은 징역 10년, 신민석은 15년을 받았다. 실제로 살인을 한 강인범(허정도)은 무기징역, 반면 은채아는 지현의 동생 지은을 직접적으로 죽인 혐의는 인정되지 않아 증거 인멸죄 등의 사유로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설지현은 천수호의 짐을 정리했다. 동생, 엄마, 남편 모두를 잃은 그는 다시 돌아갈 일상이 없자 천천히 일상을 재구축해 나갔다. 힘든 마음에 옥상에도 올라갔지만 그곳에서 “죽기로 결심했으면 죽고, 살기로 결심했으면 행복하게 살자”는 수호의 말을 떠올리며 힘을 냈다. 1년 후 보육원에서 계속 봉사활동을 하며 요리를 하는 지현의 모습이 이어지며 방송은 끝이 났다.

‘정의는 한 번 굴리면 알아서 굴러간다’. 극 중반 지현과 함께 설지은의 죽음을 알리기 위한 방송을 준비하던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은폐할수록 계속 거대해지는 권력의 악행에 대비되는 문장이었다. 힘을 얻은 지현은 이후 천수호와의 결혼을 통해 권력을 얻은 뒤 나눔재단의 비리를 캤다. 기득권층에게 장학금을 대는 재단의 구조를 바꾸는 등 지현의 칼의 방향은 구조에도 가닿아 있었다. 이후에는 배우 김정현의 하차로 한국 드라마에서는 이례적으로 ‘로맨스 없는’ 여주인공의 투쟁도 이어졌다. 

하지만 총평과는 별개로 마지막 회의 여운은 길게 남았다. 이날 가장 큰 구형을 받은 인물은 범죄의 판을 깐 천 회장과 신민석이 아니라 성매매 포주인 강인범이었다.  모든 것을 밝힌 유가족 지현이 이후 개인의 삶으로 돌아와 방황하는 장면도 생각해볼 거리를 남겼다.

배우의 연기와는 별개로 마지막 회에서 대중을 향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은채아의 행동은 캐릭터의 일관성에 대한 의문이 들게 했다. 교조적인 ‘권선징악’ 엔딩과 함께 마치 은채아라는 캐릭터의 대사가 아니라 작가와 감독이 원하는 대사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평생을 기득권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 자신을 함부로 대한 약혼자 천수호의 죽음에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있지만 설득이 부족하지는 않았을까.

MBC ‘시간’/사진제공=MBC

극 중반 동생의 죽음에 수호가 개입됐다는 사실을 안 지현은 이른바 ‘흑화’를 했다.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그는 “3일 만에 지금까지 모은 돈을 다 썼다”며 웃었다. “돈을 아끼려고 알바 끝나고 한 시간 거리를 걸어다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대목은 ‘누구에게나 유한하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말의 무용성을 나타낸다. 누구에게나 시간이 유한한 것은 팩트다. 하지만 빈자와 부자의 시간은 같지 않다. 죽음이 개입되지 않는 이상 그렇다.

‘시간’은 남자주인공 천수호의 시한부 설정을 통해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고, 천수호의 권력을 일정정도 양도 받은 여성 주인공의 분투를 그려냈다. 그것이 성공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 7월 열린 ‘시간’ 제작발표회에서 장준호 감독은 “요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이런 것들이 작동되지 않는 물신(物神)사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시간은 모두에게 유한하고 공평하다. 드라마 ‘시간’은 시간 안에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해 나갔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김정현의 태도 논란부터 하차까지, 여러 모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었음은 분명하다.

유청희 기자 chungvsky@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