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영│OST가 좋은 영화들

박진영의 표현법을 빌리자면 백지영의 노래는 물기 반, 소리 반으로 채워져 있다. 속삭이듯 밀려오는 한 대의 피아노 선율 위로 ‘총 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어’라는 가사가 던져지면 청자도 어김없이 총 맞은 이가 되어 노래에 쑥 빨려 들어간다. 스스로는 “뽕삘” 덕분이라 얘기하지만, 체념한 듯 툭툭 던지는 그의 목소리에는 공감의 힘이 있다. “많은 분들이 제 목소리에 구슬픔이 담겨 있다고 하시죠. 저는 잘 몰랐는데 제가 노래 부르면서 내뱉는 날숨이 왠지 애절하고 절제된 표현으로 들린다고 하시더라구요.” 백지영표 발라드는 거창한 오케스트라 편곡이나 거대한 바이브레이션의 파도대신 목소리 자체에 집중한다. 속삭이듯 푸념하는 혼잣말. 그래서 ‘이 바보 같은 사랑 이 거지같은 사랑 계속 해야 니가 나를 사랑하겠니’라는 가사는 비로소 백지영을 만나 살아 숨 쉬는 한 여인의 뜨거운 이야기로 태어날 수 있었다.

현재 활동하는 여자 가수 중 사랑의 아픔을 백지영보다 깊게, 짙게 그리고 함께 보여줄 수 있는 이는 없다. 그러니 다수의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를 찾는 건 당연하다. “OST와 발라드는 같은 것 같지만 일단 노래할 때부터 달라요. 발라드가 가사를 떠올리며 부른다면, OST는 스토리를 알아야 곡을 소화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시놉시스를 정독하고 어떤 배우의 테마인지를 확인한 후 연기 스타일도 공부해서 부르는 편이예요. 장면 하나하나를 떠올리면서 노래하는 거죠.” 덕분에 우리는 영혼이 뒤바뀐 두 남녀(<시크릿 가든>)를, 조직과 국가의 힘에 휘둘리는 두 남녀(<아이리스>)의 사랑을 오래도록 추억할 수 있었다. ‘사랑 안 해’를 부르기 위해 3개월간 독백레슨을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목소리에 드라마를 그려내는 그는 영화 <원스>나 <오픈 유어 아이즈> 같은 색감과 메시지가 깊은 영화의 OST에 참여하길 꿈꾼다. “평소에도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에요. 딱히 장르를 구분 짓고 보진 않지만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좋아해요. 누군가 좋은 영화 추천해달라고 하면 빠지지 않은 게 <노트북>, <오픈 유어 아이즈>,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렛 미 인> 등이죠. OST가 좋은 영화들도 역시 빠질 수 없구요.” 그래서 그녀에게 ‘OST가 좋은 영화’를 부탁했다.


1. <원스> (Once)
2007년 | 존 카니

“길거리에서 노래하던 청년과 우연히 만난 여자의 묘한 관계를 통한 잔잔한 로맨스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영화 같아요. 정말 그냥 리얼한 삶을 그대로 드러낸 것 같은 배우들의 연기에 연주 실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구요. ‘falling slowly’나 ‘lf you want me’ 같은 어쿠스틱한 사운드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행복했었어요.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영화고, 저 역시 베스트 영화로 꼽고 싶어요.”

두 남녀는 가진 것이 없다. 여자는 특별히 갖고 싶은 것도 없어 보인다. 남루한 거리에서 만난 두 사람은 기타 한 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악으로 눈빛을, 마음을 나눈다. 관계가 급진전하지도 행복한 결말도 없지만 <원스>는 사랑이라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그 어떤 감정을 음악과 함께 촘촘히 쌓아올린다. 지난 6월에는 뮤지컬로 변신한 <원스>가 토니어워즈 8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2. <물랑 루즈> (Moulin Rouge)
2001년 | 바즈 루어만

“<물랑 루즈>는 언더컬처적인 19세기 말 프랑스의 이상가 혹은 몽상가들의 삶을 배경으로 한 영화지만 보는 내내 영화에 대한 몰입도는 최고였던 것 같아요. 판타지적인 요소도 많고 의상이나 배경, 연기, 댄스까지 볼거리가 정말 많은 영화였기 때문에 더 기억에 많이 남아요. 거기에 애절하고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도 너무 아름다웠구요. 많은 분들이 OST에서 ‘Lady marmalade’를 좋아하시지만 개인적으로는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가 함께 부른 ‘Come what may’를 더 좋아해요.”

<물랑 루즈>의 ‘Lady marmalade’는 여자 가수들의 섹시한 매력을 뽐낼 수 있는 대표곡인 만큼 연말 시상식에서, 콘서트 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곡이다. 향락과 퇴폐로 가득한 파리의 한복판 ‘물랑 루즈’에도 죽음이 갈라놓지 못한 절절한 사랑이 있다. 화려한 쇼와 정교한 무대장치, 컬러풀한 의상은 물론 가난한 예술가와 그의 죽어가는 연인이라는 설정은 오페라 <라보엠>을 연상시킨다. 2001년 칸영화제 개막작.

3. <뉴 문> (The Twilight Saga: New Moon)
2009년 | 크리스 웨이츠

“뱀파이어와 늑대들의 역동적인 그래픽이 인상적이었어요. 혹 놓치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뉴 문>은 OST가 굉장히 좋은 영화예요. 그 중에서도 저는 ‘Possibility’라는 곡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에드워드가 떠난 후 벨라가 창문을 바라보며 1월, 2월, 3월 시간이 흘러갈 때 나왔던 곡이에요. 너무 애절해서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정말 강추입니다!”

<뉴 문>은 뱀파이어와 인간 소녀의 사랑을 그린 <트와일라잇>의 두 번째 시리즈로 늑대인간 제이콥을 등장시켜 에드워드-벨라-제이콥의 삼각관계를 그렸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고혹적이고 몽환적인 음악은 주인공들의 감정을 더욱 고조시켰으며, 백지영이 언급한 ‘Possibility’를 비롯해 ‘Satellite heart’ 등이 찬사를 받았다.

4. <어거스트 러쉬> (August Rush)
2007년 | 커스틴 쉐리단

“제목만 들어도 마음이 얼얼해지는 영화에요. 특히 ‘음악은 항상 우리 곁에 있어요. 귀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라는 대사가 마음에 많이 남아요. 아름다운 음악과 스토리에 반해 꽤 여러 번 반복해서 봤던 영화였던 것 같아요. 어거스트가 차 지나가는 소리, 공 튀기는 소리, 발소리, 바람소리 등 모든 것을 음악으로 느끼고 노래에 박자를 넣어주듯 표현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영화 엔딩에 나오는 ‘Someday’도 참 좋아해요.”

부모의 반대로 헤어진 연인,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이 그리고 아이를 찾는 엄마. 얼핏 가족영화의 틀을 입은 듯 하지만, 기타리스트 남자와 첼리스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통해 <어거스트 러쉬>는 음악영화로 재탄생되었다. 특히 부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루이스(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와 어거스트(프레디 하이모어)의 연주는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기분을 안겨준다.

5. <클로저> (Closer)
2005년 | 마이크 니콜스

“제작된 지 8년이 넘어가니까 분명 잊혀질만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클로저>는 여운이 참 많이 남아요. 남녀의 심리를 정말 세밀하게 잘 표현해준 영화이고, 딱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달콤하기보다는 쌉싸름한 느낌이랄까. 영화 속 네 남녀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지만 결국 그 사랑 앞에서 이기적이고 철부지가 된다는 심리가 참 좋았어요.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듯 데미안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 역시 명곡이죠.”

“Hello, Stranger” 어느 날 낯선 여자가 남자의 마음에 들어왔다.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마주쳐 인연을 맺게 된 앨리스(나탈리 포트만)와 댄(주드 로).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 찾아온 안나(줄리아 로버츠)와 래리(클라이브 오웬). 네 남녀의 엇갈린 마음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며 ‘사랑’의 의미를 되묻는다. 물기를 머금은 런던의 풍경은 이러한 질문에 더없이 어울린다.


백지영은 지난 13, 14일 브라운아이드소울, 박효신 등과 함께 가을감성페스티벌로 변화한 <2012 시월에> 무대에 올랐다. 오래간만에 관객을 만나는 자리인 만큼 그는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1시간을 ‘백지영 월드’로 꾸몄다. “긴 호흡으로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나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사랑하는 친구들, 애인, 가족 모두 함께할 수 있는 공연이라 더욱 의미가 컸구요. 가을인 만큼 달달하고 낭만적인 공연과 한편으로는 함께 춤추며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만들었어요.” 어느새 데뷔 14년차. 청자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핫한 아이돌과 댄스곡까지 소화해내지만 백지영의 꿈은 의외로 소박하다. “장르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아요. 다만 시간이 흐른 후 ‘백지영’이라고 했을 때 진심으로, 가슴으로 노래하는 가수라고 떠올려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좋겠다. 인생의 굴곡을 이겨낸 노래는 쉬이 흘러가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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