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인칭 관찰자 시점] ‘살아남은 아이’, 삼켜지지 않는 시간을 머금고

[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컷

극장의 시커먼 입 속으로 들어가서 눈앞에 쏟아지는 화면을 마주하면, 일순간 감각 기관이 열린다. 인물의 숨결에 실린 감정의 무게 중심, 묵음 처리된 인물의 속삭임, 음악이 오르락내리락 빚어내는 그림, 그저 배경이었던 공간의 그림자까지 읽게 된다. 영화관에서 나만의 페이지가, 나만의 책이 오롯이 펼쳐진다. 마음에 든 영화를 재차 보러 가면 생겨나는 특별한 순간이다. 지난 주말, 내가 영화관에서 펼친 책의 제목은 바로 ‘살아남은 아이’다.

소도시에서 인테리어업체를 운영하는 성철(최무성)과 미숙(김여진) 부부는 아들 은찬을 잃은 깊은 슬픔에 잠겨있다. 미숙은 무너진 삶에서 살아갈 이유를 부여잡기 위해 동생을 갖고 싶다는 은찬의 바램이었다며 아기를 갖자고 한다. 성철은 우연히 은찬이가 목숨을 걸고 구해서 살아남은 아이 기현(성유빈)과 마주친다. 부모로부터 내버려져서 학교를 포기하고,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아이가 못내 마음에 걸린다. 그는 자신의 일터로 데려와서 도배일을 가르친다. 나름의 기한을 정하고 말이다. 기현이가 밥벌이를 할 수 있을 때까지.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미숙은 기현의 존재가 불편하기 그지없다. 기현이가 물에 빠지지 않았다면 은찬이가 살아있으리라는 생각에, 기현이 곧 은찬이를 죽인 애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성철은 그런 미숙을 다독거린다. 그 아이는 잘못이 없다고, 은찬이가 구해준 아이라서 데려왔노라고. 미숙 역시 자신을 보면 내빼려고 하는 기현에게 차츰 마음을 내어준다. 늘 같은 옷만 입는 기현에게 거의 새옷이니 입으라며 은찬의 옷을 대본다. 그녀는 울먹거리는 기현을 안으며 토닥인다. 괜찮다고.

세 사람의 빛바랜 하루하루에도 온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미숙의 짓무른 눈가에도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 고이기 시작한다. 성철은 기현에게 살가운 장난도 하면서 아웅다웅 가까워진다. 자신의 아들과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을 나눈다. 성철의 분홍 옷핀과 기현의 파랑 옷핀은 하나의 매듭처럼 둘을 묶는다. 기현이 정식직원이 된 기념으로 간 나들이에서 그들은 누가 봐도 가족이다. 수줍게 음식을 나누고, 웃음을 나눈다. 기현이 은찬이 죽은 ‘그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까지는 말이다.

차곡차곡한 결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신동석 감독의 서사를 풀어내는 농도가 꽤 진하게 다가온다. 그는 각본도 책임졌는데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저릿하게 파고든다. 배우들의 넘치지 않는 연기도 좋다. 최무성과 김여진에게서 배어나는 감정은 더 깊숙이 스며든다. 열아홉 자신의 나이를 훌쩍 넘기는 출연작 수를 가진 성유빈은 인생작을 만난 듯싶다. 엷은 미소나 특유의 입매가 잔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더불어 섣부른 회상으로 감정을 끌어오지 않는 작품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머릿속에 그리게 하고, 그 안에서 인물을 쓰다듬도록 이끈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아픈 장면은 기현의 입을 통해 가혹한 진실을 대면하고 걸어가는 미숙의 뒷모습이다. 손을 떨며 허청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위태한 선율이 덧입혀지면서 미어진다. 뼛속까지 차오르는 아픔은 그녀를 삼킨다. 또한 겉으로는 덤덤했던 성철도 송두리째 집어삼킨다. 그리고 부부에게 친절한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이들은 은찬의 죽음을 숭고하게 만든다는 미명하에 항소를 그만둘 것을 권하고, 보상금을 목숨값으로 퉁 치는 어이없는 산술을 들이댄다.

‘살아남은 아이’의 결말은 꽤 묵직하다. 미숙의 안도하는 숨과 눈빛에서 꼬물거리는 삶의 기척이 느껴졌다. 상처로 얼룩진 그들이 나누었던 온기가 떠올랐다. 물론 그들은 평생 삼켜지지 않는 시간을 머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도 세 사람이 살았으면 한다. 살아남았으면 한다.

8월 30일 개봉. 12세 관람가.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