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공연] 검은 영웅, 켄드릭 라마

[텐아시아=이은호 기자]

지난 30일 서울 잠실주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공연을 연 미국 힙합가수 켄드릭 라마. / 사진제공=현대카드

사내는 고(故)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킹 목사의 얼굴 위아래로 ‘꿈이 죽게 내버려 두지 말라(Don’t let the dream die)’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내겐 꿈이 있다(I have a dream)”며 흑인 해방 운동에 평생을 헌신한 킹 목사에 대한 경외의 표시였다. 사내는 이 티셔츠를 입고 미국의 힙합가수 켄드릭 라마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 퓰리처상 위원회로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삶을 강력하고 진정성 있는 언어로 포착했다’고 평가받은 그를. 불평등 해소와 자유 성취를 역설한 그를. 현대의 ‘검은 영웅’인 그를.

지난 30일 서울 송파구에 있는 잠실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4 켄드릭 라마’가 열렸다. 준비된 2만여 장의 표는 일찌감치 모두 팔렸다. 이날 서울의 낮 최고 기온이 37도까지 올랐을 만큼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거나, 노동이 시작되는 월요일 공연이 열려 다음날의 안녕을 담보할 수 없다거나, 객석이 스탠딩으로만 구성돼 역경(?)과 피로가 예상된다는 우려 따위는 켄드릭 라마의 이름 앞에서 힘을 잃었다. 이른 저녁부터 현장에 모여든 관객들은 서로 몸을 부딪치고 팔을 휘저으며 켄드릭 라마의 음악에 빠져 들었다.

2만 여 명의 관객들이 몰려 든 켄드릭 라마의 서울 공연. / 사진제공=현대카드

“‘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amn.)”라고 적힌 전광판에 미국 폭스 뉴스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켄드릭 라마가 경찰차 위에 올라가 랩을 한 퍼포먼스에에 대해 ‘지금의 힙합은 젊은 흑인들에게 인종차별보다 더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비판한 뉴스다. 켄드릭 라마는 이 뉴스에서 딴 음성을 정규 4집 ‘댐(DAMN.)’의 첫 곡 ‘블러드(BLOOD)’에 삽입해 다시 그들을 심판했다. 영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켄드릭 라마는 단박에 무대 끝까지 걸어 나와 객석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시작부터 뜨거웠다. 켄드릭 라마는 자신에게 그래미 어워즈 5관왕의 영예를 안긴 정규 4집 ‘뎀(DAMN.)’의 타이틀곡 ‘DNA’를 공연 첫 곡으로 불렀다. ‘엘레멘트(Elemnet)’ ‘러브(Love)’ ‘로열티(Loyalty)’ ‘프라이드(Pride)’ ‘험블(Humble)’ 등 이 음반 수록곡이 대거 등장했고 ‘스위밍 풀(Swimming Pool)’ ‘매드 시티(M.A.A.D City)’ ‘빅샷(Big Shot)’ 등 이전 히트곡도 만날 수 있었다.

켄드릭 라마는 앙코르 곡 ‘올 더 스타즈’를 부르면서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 사진제공=현대카드

공연은 짧고 굵었다. 켄드릭 라마는 70여 분 동안 약 20개 곡을 불렀다. 밴드와 조명은 무대의 양 편에 자리했다. 덕분에 무대 중앙은 온통 켄드릭 라마의 차지였다. 그는 제왕처럼 무대를 누볐다. 화염과 불꽃, 번쩍거리는 조명은 물론 시선을 끌었지만 라마의 랩 퍼포먼스는 그보다 더 화려했다. 관객들의 ‘떼창’은 ‘킹 쿤타(King Kunta)’와 ‘올라잇(Alright)’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흑인을 향한 차별과 폭력, 그럼에도 ‘우린 괜찮을 거야(We gon’be alright)’라며 희망을 얘기하는 이 두 곡이 2만 여 개의 목소리로 다시 불렸다. 전율이 일었다.

켄드릭 라마는 앙코르 곡으로 영화 ‘블랙팬서’의 OST인 ‘올 더 스타즈(All The Stars)’를 선곡했다. 관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휴대전화 전등을 켰다. 노래 가사처럼 별들이 가까이에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공연은 쏜살같이 지났지만 켄드릭 라마가 웃으며 남긴 약속은 오래도록 남았다. “코리아, 아 윌 비 백(Korea, I’ll be back)”

이은호 기자 wild37@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