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인칭 관찰자 시점] ‘버닝’, 때로는 불도 꽃도 되는 불꽃 청춘

[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영화 ‘버닝’ 해외 포스터

영화 ‘버닝’ 해외 포스터

‘버닝‘이라는 단어가 왠지 친숙했다. 곰곰 생각하니, 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맨투맨 기초영어’의 첫 페이지에 나왔던 1형식 문장이 떠올랐다. ‘Fire burns.’ 책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기억하는 문장이지 싶다. 영어 공부로 불타오르지는 못했지만, 영화 관람으로 불타오르던 시기였다.

유통회사 아르바이트로 배달을 간 종수(유아인)는 행사 도우미로 일하는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어릴 적 한동네 친구였지만 마임을 배우고, 아프리카로 떠나는 그녀가 다르게 보인다. 문예창작학과를 나왔지만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무엇을 소설로 써야 할지 모르겠고, 재판 중인 아버지를 대신해 고향인 파주로 가야 하는 자신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해미의 자취방은 북향이지만 하루에 딱 한 번 남산타워에 반사된 빛이 쓱 들어왔다가 쓱 사라진다. 한줄기 빛은 해미와 닮았다. 생기보다는 허기가 느껴지는 종수에게 해미는 참 눈이 부시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남자 벤(스티븐 연)을 종수에게 소개한다. 미스터리한 벤의 등장으로 이야기에 물살이 일기 시작한다. 사람 좋은 미소와 맑은 하품을 하는 그는 문득문득 선뜩하다.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지만, 역으로 재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 종수에게 벤은 불편하고 열패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다.

어느 날, 대남 방송이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파주 종수의 집으로 포르쉐를 몰고 찾아온 벤은 자신의 은밀한 취미생활을 고백한다. 그날 이후, 종수는 강렬하고 달뜬 예감에 사로잡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에서 소설의 모티브만 차용한 영화는 이창동의 ‘버닝’으로 점화했다. 헛간이라는 공간은 한국에 맞는 비닐하우스로 대체됐다.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헛간보다 훨씬 더 음울했다. 이창동의 다른 영화들보다 적극적으로 사용된 음악은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주연을 맡은 세 배우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제대로 마주하고, 불씨가 되어 영화 속에서 타닥타닥 타들어간다. 앞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처럼 연기로 뽑아낼 최대치를 보여준다. 유아인과 스티븐 연은 마치 심장까지 종수와 벤인 것처럼 캐릭터와 하나가 됐다. 이내 웃고, 이내 울고, 이내 잠이 드는 해미를 연기한 전종서는 독특한 목소리를 가졌다. 그녀가 화면에 등장하지 않아도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니셜처럼 그녀를 상징하는 목소리는 영화에도 울림을 줬다.

영화 초반부에 귤을 먹는 마임을 하면서 내뱉는 해미의 말은 주술처럼 영화 내내 따라붙는다.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여기에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된다고.

나는 감기에 걸렸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술술 읽힌다. 나른한 감기 기운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한 그의 이야기에 더 잘 흡수되게 만든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두 번째로 ‘버닝’을 보러 갔을 때는 감기에 걸렸다. 결말을 알고 보기에 되감기 같은 관람일 수도 있지만 꽤 흥미로운 순간을 맞이했다. 인물의 마음 속 말이 들리기도 하고, 첫 관람과 다른 결말로도 보였다.

청춘은 때로는 불도 되고, 때로는 꽃이 되기도 하며 불꽃같은 시기를 보낸다. 영화 속 대사에 나오는 ‘그레이트 헝거’처럼 삶의 의미에 굶주려 있기 때문일까. 꼭 청춘이 아니더라도, 삶의 의미를 되새김질하고 있다면 지금 극장에서 ‘버닝’을 만나기를 권한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작가 박미영은 영화 ‘하루’ ‘빙우’ ‘허브’의 시나리오,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의 극본,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의 동화를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입문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 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