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인칭 관찰자 시점] ‘이티’, 지구소녀의 가슴에 남은 1984년

[텐아시아=박미영 작가]
‘E.T.' 스틸컷

‘E.T.’ 스틸컷

 

1984년. 드디어! 열 살이 됐다. 일의 자리 인생에서 십의 자리 인생으로 넘어갔다. 2014년 1월 1일에 열 살이 된 아들은 패기 넘치게“나는 10대다!”라고 외쳤지만, 1984년의 나는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어린이라고 다 같은 어린이가 아니라 좀 특별한 어린이가 된 거야, 라고.

그 특별함에 정점을 찍어 준 사람은 외숙이었다. 사촌언니를 데리고 극장에 가려던 외숙은 한 동네에 살아서 제집처럼 드나들던 조카까지 챙겼다. 생애 처음 가본 극장은 생애 처음 가본 놀이동산만큼이나 신세계였다. 고개를 몇 번 돌려야 채워질 것 같은 어마어마한 화면과 귓속까지 쿵쿵 파고드는 사운드 그리고 상상 속에서만 만났던 외계인이 실재했다. 나의 운명적인 첫 영화는 바로 ‘이티’였다.

일행과 떨어져서 지구에 남겨진 E.T.는 특유의 기다란 손가락으로 먼저 등장한다. 엘리엇과 처음 만났을 때, 둘은 모습은 전혀 다르지만 데칼코마니처럼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향해 비명을 내지른다. 다시금 둘은 마주하게 되고, 이내 다른 공간에서도 서로의 감정을 느끼는 ‘우리’가 된다. 집에서 냉장고의 술을 마시고 취한 E.T.의 알딸딸한 취기가 학교 실험실에 있는 엘리엇에게 전해져 귀여운 개구리 키스 소동이 펼쳐진다.

E.T.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있었으니, 엘리엇의 동생인 거티 역을 맡은 드류 베리모어다. 마론인형보다 헤어스타일도 얼굴도 어여쁜 금발 소녀는 외계인만큼이나 놀라운 존재였다. 영화를 본 후 드류 베리모어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한동안 종이에 그리고 또 그렸던 기억이 있다.

‘이티’에는 소녀감성인 엘리엇의 엄마를 제외하고는 어른들의 얼굴은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 철렁거리는 열쇠 더미로 인트로부터 존재감을 주던 케이스도 영화 시작 후 80분이 넘어서야 제대로 얼굴이 드러난다. 이제껏 등장하지 못했던 어른들의 얼굴이 화면을 채우는 시점은 E.T.의 생명이 위태로울 즈음인 후반부다. 아이들의 눈높이로 그려지는 세계인 것이다.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바람처럼 오롯이 어린이를 위한 영화인 것이다.

SF 영화는 특수효과 같은 볼거리보다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가상의 세계는 설득력을 가진 현실로 다가온다. ‘이티’에는 너무도 유명한 두 번의 자전거 비행 신이 있다. 첫 자전거 비행은 뭉클함을, 두 번째 자전거 비행은 뭉클함부터 스릴까지 선사한다. 두 번째 자전거 비행 앞에 배치된 추격 신에서는 아이들을 대신한, 굉장히 티가 나는 성인 엑스트라가 등장하지만 긴박한 드라마를 방해할 만큼은 아니다.

영화 내내 엘리엇의 가족들은 샐리라는 여자와 멕시코로 떠난 아빠를 그리워한다. 미지의 별에서도 E.T.를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장치다. 결국 미지의 누군가는 E.T.를 데리러 다시 지구를 찾는다. 이별의 순간을 맞은 엘리엇은 E.T.를 가지 말라며 붙든다. E.T.는 그런 엘리엇의 이마를 가리키며 말한다. “I’ll be right here.”

1984년의 나는 E.T.와 함께였다. 우리 동네 문방구들은 물건을 사면 그림칩이라는 이름으로 스티커를 지급했다. 100개를 모으면 300원짜리 학용품과 교환할 수도 있었다. 나중에 생긴 마징가문방구가 훨씬 핫했지만, 모음판에 그려진 E.T.가 좋아서 늘 88문방구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팔던, 조악할지라도 E.T.가 그려진 문구류는 매번 설렜다. 산울림의 김창완이 만든 노래 ‘외계인 이티’를 입에 달고 살았다. ‘식빵같이 생긴 이티의 머리 하하하하 우스워~ 송아질 닮았네 이티의 눈은 하하하하 귀여워~ 이티 이티 외계인 이티~ 이티 이티 내 친구 이티~’

열 살의 나는 ABC크래커로 알파벳 대문자를 익혔다. 엘리엇이 붙인 E.T.라는 이름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이름에 숨겨진 의미를 알고 싶지가 않았다. 엘리엇의 친구이지만 이제 내 친구이기도 한 E.T.를 신비롭게 두고 싶었다. 엘리엇은 그믐달이 뜬 밤에 E.T를 만나서 보름달이 뜬 밤에 떠나보냈다. 차마 E.T를 떠나보내지 못했던 열 살의 나는 평범한 동네 소녀에서 비범한 지구 소녀가 되어서 무지개 포물선을 그리며 은하계를 날고 있었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작가 박미영은 영화 ‘하루’ ‘빙우’ ‘허브’의 시나리오,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의 극본,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의 동화를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입문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 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