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열전│④ 최정우 “광대로 태어났으면 그냥 광대로 끝나는 거지 뭐”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척하지만 그래서 가장 외로운 남자. 배우 최정우는 늘 그런 아버지의 모습으로 우리의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딸이 사랑하는 남자의 손에 자신이 직접 구운 빵 두 개를 쥐어주며 “혜리랑 둘이 나눠먹어”라는 말을 남긴 채 돌아서는 SBS 의 마상태 사장의 뒷모습, 아들의 인터뷰 기사에 남몰래 ‘선플’을 달던 MBC 의 구호승 회장의 손끝은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진한 여운을 남겼다. 심지어 질투와 구박을 빼고는 논할 수 없는, “세계 최초로 자식 이기는 부모”가 되겠다고 선언한 MBC 의 류정우마저도 두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선다. 그러나 아버지의 옷을 벗고 TV 밖으로 나온 배우 최정우는 천상 아버지가 아니라 “외줄 위에 서서 잘 걸어가는 미친 광대로 삶을 마감하고 싶은” 천상 배우였다. 서글서글한 웃음 사이 사이, 30년 넘게 무대에 서 온 치열함과 언젠가는 꼭 베를린 영화제에 진출하겠다는 욕심을 드러낸 배우 최정우를 만났다.

주로 피도 눈물도 없는 회장님 역할을 맡다가 이번 에서는 양복을 벗고 유치찬란한 아버지로 나온다.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들 반응이 좀 다른 편인가.
최정우: 미니 시리즈를 꽤 많이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사람들 절반이 내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알아본다. 난 그게 참 좋다. 내 이름을 알리기 위해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거나 부단히 노력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알아봐 주시니까. 이왕 연극 무대에서 TV로 넘어온 이상 한 발 한 발 가보자는 생각을 하지만, 아직까지 일일 드라마나 주말 연속극에 출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최정우: 누군가는 잘난 척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매일같이 날 보여준다는 게 소모전 같다. 배우 생활을 길게 하려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TV는 이미지로 캐스팅을 한다. 그래서 아버지, 기업 간부 역할을 많이 했던 거고. 아직 스스로에게 부족한 점도 많은데 6개월 동안 매일같이 TV에 나오는 게 시기상조가 아닌가 싶다. 행여나 사람들한테 자신을 알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으로 비춰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고. 천천히 하고 싶다.

“류정우는 악인이 아니라 악동”
배우열전│④ 최정우 “광대로 태어났으면 그냥 광대로 끝나는 거지 뭐”
그런데 는 일일 시트콤이지 않나. 장르까지 낯선데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최정우: MBC 촬영할 때 이동윤 감독과 술 한 잔 하면서 “시트콤의 매력은 알겠는데 그것도 콤비가 맞아야 하는 거지. 만약 콤비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각도에서 시트콤을 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주로 정극에서 권위 있고 흐트러지지 않는 연기를 하다가 시트콤에 와서 푼수짓도 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배우들이 많은데, 난 그걸 원했던 건 아니다. 원래 코미디를 좋아하는 편이라 시트콤은 언젠가 한 번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코미디언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분위기라 그 쪽과 거리를 많이 뒀다. 차라리 연극 무대에서 코미디를 하자. 그런데 요즘에는 예능인, 개그맨들을 높게 대접해주는 시절이니까 오버하지 않고 진솔한 코미디를 하면 사람들에게 큰 웃음으로 다가갈 것 같았다.

첫 시트콤 연기인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시트콤이라는 장르 때문에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나.
최정우: 그건 다 연극 무대에서 타이밍, 템포, 박자를 습득한 덕분이다. 물론 장르는 다르지만 관객들 앞에서 이런 대사를 던졌을 때 어떤 반응이 오는지 수없이 경험해봤다. 전진수 감독은 애드리브를 해도 된다고 하는데, 한 번 하면 한도 끝도 없이 해야 돼서 아직까지는 99.9% 대본대로 하고 있다. 대신 뉘앙스에 변화를 주는 편이다. 시완(임시완)이 가방에서 팬티를 발견하는 장면에서도 원래는 그렇게 안 쓰여 있었는데 막 고함을 질렀다. 류정우가 다혈질이고 욱하는 캐릭터다보니까 표정이나 느낌이 날카롭게 서 있어야 코미디가 된다고 생각했다. 가짜로 싸우거나 화내면 하나도 안 웃기잖아. 초반에는 많이 질렀다가 지금은 약간 순화시켰다.

류정우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시완이와 함께 살겠다는 아들 류진행(류진)의 심기를 건드리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세계 최초로 자식 이기는 부모”가 되겠다면서. (웃음)
최정우: 그 때가 바로 분노의 코미디, 땀 흘리는 코미디, 극악스러운 코미디를 하겠다는 의도를 맥시멈으로 끌어올린 순간이었다. 하하.

같은 중년 남자로서 처음에 류정우라는 캐릭터를 보고 어땠나.
최정우: 밉상 중의 밉상, 찌질이 중의 찌질이였지. (웃음)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인 시완이한테 놀부 영감 이상으로, 구박을 넘어 학대를 하고 있잖나. 그런데 누군가가 시완이를 힘들게 하고 고문을 해야 시청자들이 시완이를 사랑할 수 있다. 갈등이 있어야 드라마가 형성되니까. 그렇다고 류정우 싫어, 라고 느낄 정도까지 가면 악인이 된다. 류정우는 악인이 아니라 악동이다.

그 선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힘들었을 것 같다. 자칫 잘못하면 비호감 캐릭터가 될 수도 있는데.
최정우: 사실 사회구조 자체가 부모 세대는 잔소리의 세대일 수밖에 없고, 자식 세대에서 바라보는 우리 기성세대는 만나는 것 자체가 싫고 불편한 세대다. 게다가 류정우는 캐릭터들 중에서도 가장 악역이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밉지만 계속 미워할 순 없는 존재로 그려보자고 감독, 작가님과 합의를 했다. 캐릭터 안에서 다양함을 찾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화를 낼 때는 분노에 찬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목에 핏대까지 다 서 있어야 하고, 어떨 때는 찬바람이 쌩 불 정도로 무서워야 하고, 가끔은 정말 징글징글하다고 느낄 수 있는 표정도 시도해보고.

손자 임시완과 붙었을 때 류정우의 유치하고 질투심 많은 성격이 극대화되는데, 임시완과의 호흡은 어떤가.
최정우: 코미디라는 건 산전수전 다 겪다보면 그 안에서 나오는 건데, 시완이는 산전수전까지 가지도 않았는데 코미디를 잘 알겠나. 보면 그냥, 예쁘장한 꽃미남이다. 하하. 그런데 이 친구가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코미디에 동화되더라. 스탠다드하게 움직이던 연기가 구겨지기도 하고 기울여지기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물스물 동화되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참 잘해줘서 기분이 좋다.

“마지막 나의 종착지는 연극 무대”
배우열전│④ 최정우 “광대로 태어났으면 그냥 광대로 끝나는 거지 뭐”
현장에서 가장 고참인데, 후배들에게 연기적으로 조언을 해주기도 하나.
최정우: 선배로서 후배한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런 거 안 한다. 젊었을 때 연기한다는 건 천재성을 가진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런 친구들한테 뭔가를 얘기하면 그게 더 혼란스럽고 힘들다. 자기 안에서 서서히 깨우쳐서 나와야지. 사실 처음에는 조언을 해주려고 했는데 내 코가 석자다보니까. (웃음) OCN 와 SBS 을 같이 하고 있으니까 목요일 저녁에 대본이 나오면 이걸 어느 정도 빨리 익혀놔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1~2시간 잠깐 밥만 먹고 오로지 대본만 본 적도 있다.

연륜이나 경험에 기대지 않는 편인가.
최정우: 다른 건 잘 못하는데 한 번 시작하면 무섭게 파고드는 성격이다. 파면 팔수록 좋은 게 나오거든. 아무리 내가 잘났어도 여기서 뭘 파고들지 않는 이상 추락밖에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계속 들여다보고 파고 있으면 종이에 누워있던 글자가 허리를 펴고 서서히 올라온다. 이 느낌이 와야 내 말이 된다. 정극을 할 때보다 더 많이 집어넣는데도 현장에 가면 덜컹거리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짜증날 때가 있었다. 이걸 왜 한 방에 못 끝내는지.

부터 SBS , 까지 캐릭터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인물들을 관통했던 것은 자식밖에 모르는 팔불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최정우: 특히 가 그랬다. 딸 혜리(김소연)를 위해 다 희생하고 빵집 하나 차렸으니까. (웃음) 소현경 작가님이 써준 마상태라는 인물은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종합선물세트였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마상태라는 인물이 참 좋았다. 드라마에서 그런 인물을 다시 못 만날 것 같다. 지금 류정우에게도 마상태의 흔적이 묻어있다. 에서 가라는 법대 안 가고 의상학과 갔다고 혜리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는데, 에서도 류정우가 진행이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긴다. 나 혼자 추리해봤는데, 의 일부분, SBS 의 일부분이 모여서 로 넘어간 것 같다.

대본에 나와 있는 것 외에 실제 자신의 모습이나 가치관이 묻어난 경우도 있었나.
최정우: 인생은 일과 사랑, 두 가지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건데 나의 결격사유 중 하나가 아이를 싫어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식이 없다. 광대로 태어났으면 그냥 여기서 광대로 끝나는 거지 뭐. 하하. 영화 에서 광대 장생(감우성)이 인두로 눈을 지지고 마지막에 했던 대사가 굉장한 여운으로 남았다. 삐에로, 광대, 배우가 사람들에게 기쁨과 슬픔을 전달하면서 그들의 삶에 희망을 주는 포지션이라면, 부를 축적해서도, 너무 유명해져도 안 될 것 같다. 내가 처음 연기를 시작했던 곳도, 마지막 나의 종착지도 연극 무대다.

여전히 연극에 대한 애정이 큰데 TV로 영역을 넓힌 계기는 뭐였나.
최정우: 30대에 연극 를 하면서 돈을 진짜 많이 벌었다. 그 돈으로 영화감독 공부를 해보겠다고 미국 LA에 갔는데 공부는 개뿔, 1호 포장마차를 열었다. 한인들끼리 연극이나 책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랑방을 하나 만들자는 생각이었는데, 손님들이랑 술을 먹다가 6개월 만에 속병이 났다. (웃음) 결국 1999년도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연극과 영화를 했다. 그런데 영화 를 찍기 전에 영화 시장이 굉장히 안 좋았다. 1년에 10편도 안 만들어지는 영화계의 IMF였다. 아는 후배가 TV 드라마를 해보라고 하더라. 당시 TV를 회사라는 조직에 비유하면서 나는 회사에 들어갈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의 아니게 출근을 해야 되고 여러 사람들한테 인사를 하면서 대인 관계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데 난 굉장히 비사교적인 인간이거든. 지금도 부끄러움을 굉장히 많이 타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그런데 가 관객 수 500만 명을 넘으면서 방송국에서 섭외가 들어왔다. KBS 에서 왕(인조)을 시켜줬다. 약간 병적이고 사이코 같은 성격의 왕을 나름 잘 표현했던 것 같다.

로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건 SBS 때였다.
최정우: 막바지에 전국 시청률이 약 40%였는데, 이 드라마를 하면서 깜짝 놀랐다. 그 전까지는 모든 저녁 시간을 대학로에서 보내고 시간 나면 영화 찍으러 다니느라 TV를 볼 시간이 없었다. 20년 넘게 드라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TV 드라마가 왜 대한민국에 필요한지 몰랐다. 그러다가 끝나고 개인적인 일 때문에 지방을 많이 돌아다녔는데, 밥 먹으러 식당에 갈 때마다 이런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줘서 감사하다고 하시더라. 나를 알아봐서가 아니라, 왜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에 빠져 살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해소돼서 기뻤다. 좋은 책을 읽으면 사람의 인생이 바뀌듯이 좋은 작품을 보면 사람이 좋은 쪽으로 승화되는데, 드라마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더라. 그 때부터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드라마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이후 계속 드라마에 출연했다.

“베를린영화제에 나가는 게 최종적인 꿈”
배우열전│④ 최정우 “광대로 태어났으면 그냥 광대로 끝나는 거지 뭐”
드라마에 대한 욕심이 생긴 셈인데, 연기하는 태도도 좀 달라지던가.
최정우: TV에 많이 출연하지도 않았고 TV라는 매체와 맞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여기에 최선을 다해 애정을 쏟으면 틀림없이 좋은 드라마로 호평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봤다는데 나는 나이 오십에 드라마를 알게 됐다. 으하하하.

스스로에 대해 비사교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됐나.
최정우: 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영화광이셨던 외할머니께서 어린 나를 단성사, 스카라극장에 데리고 다니시면서 “이 다음에 커서 훌륭한 배우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내성적이고 숫기도 없는 애가 무슨 배우가 돼, 말이 안 되는 거지. 연기를 시작한 건 치유의 목적이 강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자랐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산꼭대기에 살았다. 산을 넘어 물을 길어다가 항아리에 넣어놓고, 물지게에 연탄을 지고 올라오고. 실어증까지 걸렸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다른 사람의 생을 체험하면서 자신을 교화시켜보라고 하셨다. 마치 사이코드라마로 심리 치료하는 것처럼.

과거 연극이 자신을 치유해줬던 것처럼, 여전히 연극에 그런 힘이 있다고 믿나.
최정우: 문화 선진국들이 연극을 교육의 범주 안에 넣는 이유는 어린 시절에 빨리 남의 입장에 서보라는 뜻인 것 같다. 우린 아직까지도 나 이거 싫어, 이거 못 먹어, 너무 유아적인 것 같다. 연극을 통해 남의 입장을 체험하고 나오면 서로를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연극이라는 장르가 하는 역할이다.

그러면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 욕심도 있나.
최정우: 난 가르칠 힘이 없다. 다만, 친한 벗들이 그런 일을 많이 하면 자연스럽게 동참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장훈이라는 친구 때문에 많은 연예인들이 봉사와 기부를 하고 있는 것처럼.

30년 넘게 연극,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연기를 해왔는데, 배우 최정우의 최종 꿈은 뭔가.
최정우: 베를린 영화제에 나가는 거다. 지금도 넌 어느 쪽이니 하면서 좌우에 시달리고 있는데 좋은 영화로 화두를 던져보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 시나리오도 쓰면서 꿈틀꿈틀거리고 있다. 벗들과 함께 모여서 그 꿈을 버리지 않고 갖고 가고 싶다. 내가 만약 삼류가 아니라면, 숨을 다 거둘 때까지 외줄 위에 서서 잘 걸어가는 미친 광대로 삶을 마감하고 싶다.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