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人] 지이선 작가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거예요”

[텐아시아=김하진 기자]
연극 '더 헬멧' 공연장면 / 사진제공=아이엠컬처

연극 ‘더 헬멧’ 공연장면 / 사진제공=아이엠컬처

분명 공연 하나를 다 보고 나왔는데, 다시 같은 작품을 예매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펼쳐져서다. 게다가 무대는 한가운데 있는 여닫이문으로 가로막혀 있다. 이 문이 막히면 맞은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연극 ‘더 헬멧-룸스 볼륨 원(The Helmet-Room’s Vol.1, 이하 더 헬멧)의 이야기다.

‘더 헬멧’은 한국 서울과 시리아 알레포를 각각 ‘룸 서울’과 ‘룸 알레포’ 두 개의 시공간으로 나눠 극을 진행한다. ‘룸 서울’에는 다시 백골단(빅 룸)과 학생(스몰 룸)의 이야기가 동시에 흐른다. ‘빅 룸’ ‘스몰 룸’은 객석의 위치에 따라 나뉜다. 따라서 자신이 어디에 앉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보게 되는 것이다. ‘룸 알레포’는 화이트 헬멧(빅 룸)과 아이(스몰 룸)의 이야기다. 총 4개의 공간에 대본도 4개다.

다양한 작품으로 호흡을 맞춰온 김태형 연출가와 지이선 작가가 손을 잡고 완성했다. 오는 3월 4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지난해 12월 개막해 독특한 무대 디자인과 흔하지 않은 구성으로 입소문을 탔다. 관객들은 극장을 빠져나오며 “신선하다”며 흡족해한다.

그동안 무대를 시시각각 바꾸며 다채로운 볼거리를 앞세운 작품은 있었으나, 자신이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맞은편의 이야기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는 점이 매우 독특하다. 자칫 답답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이야기만으로도 가슴이 뜨겁다. 이따금씩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소리에 문득,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공연을 보고 나가면서 다른 좌석으로 다시 예매하는 것도 그래서다. 궁금함과 알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동시에 든다.

수정을 거듭하며 완성한 총 4개의 대본으로 첫 공연을 올리고 한숨 돌린 지이선 작가를 만났다. 좋은 공연이라고 하니, 고개를 저으며 “아직도 긴장하고 있다”고 했다.

연극 '더 헬멧' 출연자들, 백골단(위), 화이트 헬멧(아래) / 사진제공=아이엠컬처

연극 ‘더 헬멧’ 출연자들, 백골단(위), 화이트 헬멧(아래) / 사진제공=아이엠컬처

◆ ‘더 헬멧’의 탄생

“스몰 룸을 수정하려면 빅룸도 같이 고쳐야 해요. 한쪽이 모자라서 채우면 다른 한쪽에 문제가 생기거든요. 다시 추가를 하면 또 다른 쪽을 수정해야 하고…제가 이 작품을 왜 한다고 했을까요? 하하.”

동시에 두 가지 이야기가 하나의 공연장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이다. 지이선 작가는 그간 연극 ‘모범생들’ ‘카포네 트릴로지’ ‘킬미나우’ ‘햄릿-더 플레이’ ‘벙커 트릴로지’ ‘프라이드’ 등을 창작 혹은 각색했다. 최근까지 각색 작업을 이어오다 ‘슬슬 창작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더 헬멧’의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더 헬멧’의 영감은 영국 제스로 컴튼 프로덕션의 연극 ‘트릴로지’ 시리즈에서 받았다. 김태형 연출가와 지이선 작가는 2015년 국내 초연한 ‘카포네 트릴로지’와 ‘벙커 트릴로지’로 호흡을 맞췄다.

“‘트릴로지’ 시리즈를 하기 전에 김태형 연출과 제작사 아이엠컬처 대표님이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다녀왔어요. ‘이런 공연을 하면 좋겠다, 하고 싶다’며 설명을 했죠. 공연하는 방을 두개로 나눠서 해보자고요. 그때까지는 제가 대본을 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웃음) 사실 ‘트릴로지’ 시리즈도 쉽지 않았거든요. 갑자기 ‘더 헬멧’ 제안을 받아서 처음엔 부담이었어요. 반면 실험을 하겠다는 상업 제작사가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란 생각도 들었죠.”

지 작가는 “벙커 트릴로지’의 연습 때 ‘더 헬멧’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왔다. 방 두 개를 쓰는 공연이란 게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제 몫이었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할지 고민했죠. 시리아 내전에 관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계속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화이트 헬멧'(알레포에서 활동하는 민간단체)으로 결정했어요. 김태형 연출가도 승낙했고, ‘벙커 트릴로지’를 하면서 전쟁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그때 화이트 헬멧의 존재를 알았어요. 관련 자료를 보다가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룸 서울’의 한국 학생 운동 이야기는 김 연출이 제안했다.  ‘화이트 헬멧’이란 주제로 백골단(사복경찰 체포조)의 이야기도 같이 해보자고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결정됐고, ‘두 방의 이야기를 다르게 가보자’로 이어졌죠. 제작사 대표가 ‘크리스마스 즈음에 공연을 올리는데 민주화에 전쟁 이야기를 진짜 할 거냐’고 세 번을 묻더군요.(웃음) 1차 세계대전 이야기인 ‘벙커 트릴로지’도 연말에, 그것도 다른 나라 이야기도 하는데 ‘재미있게 잘 만들어 볼게요’ 그랬죠. 다시 생각을 해보라고 해서, 재미있게 잘 쓰는 방향으로 생각을 해보겠다고 답했어요. 이후 총 네 가지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했어요. 네 개를 하겠다고…제가 미친 거죠.(웃음) 두 개로 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연극 '더 헬멧' 공연장면 / 사진제공=아이엠컬처

연극 ‘더 헬멧’ 공연장면 / 사진제공=아이엠컬처

◆ ‘더 헬멧’의 완성

“이야기의 틀이 잡히니까 공연의 형식도 스몰 룸과 빅 룸 형태로 결정 났어요. 그때부터 일이 커지기 시작했죠.(웃음) 의견을 하나씩 보태니까요. 방을 두 개로 나누는데, 닫힌 문이 열리지 않으면 가치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방을 열어야 의미가 있을 것 같았어요. 방을 열려고 하니, 비용이 발생하잖아요. 그러다 내부를 볼 수 있는 ‘매직 그라스’ 이야기가 나왔어요. 마치 거울처럼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맞은편에 있는 서로를 볼 수 있는 장치죠. 그게 비용이 어마어마하거든요. 처음 나왔을 때보다 가격이 떨어진 건데도 엄청났죠. 필름을 부착해서 보였다, 안 보였다 하게 만드는 건데 열심히 알아보다가 끝내 하게 됐습니다. 이 부분은 김태형 연출가가 제작사에 밀어붙였어요. ‘안 하면 공연 못한다’고 그랬죠(웃음)”

쓸 이야기를 결정한 지이선 작가는 김태형 연출가와 본격 공연 준비에 돌입했다. ‘더 헬멧’을 만드는 과정은 어느 하나 순조롭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매직 그라스를 해결하니까 다음 문제가 생기더군요. 완전 방음이 안되는 거예요. 공연에서 방음이 안되는 건 심각한 문제죠. 극장에서 연습을 시작했을 때 배우들도 공연장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걱정을 많이 했는데, 관객들이 어느 정도의 소음은 받아들여주시더라고요. 물론 어느 장면에선 의도해서 맞은편의 소리를 내기도 해요. 그럼에도 관객들이 거슬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죠. 사실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대본 연습 때도 스몰 룸, 빅 룸 따로 하지 않고 동시에 읽었거든요. 읽다가 점점 짜증이 나죠.(웃음) 배우 이석준은 저와 연출가에게 ‘다 들리냐?’고 물을 정도였어요. 저는, 제가 쓴 거니까 다 들린다고 했죠.(웃음)”

이쯤 되니 배우들의 연습 과정이 궁금해질 정도다. 생전 처음 접하는 이 공연을 연습하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김태형 연출가와 저의 화두였는데, 형식과 드라마 중 무엇이 먼저인가 항상 고민했어요. 공연 무대를 정면 지향으로 했더라면 더 살아나는 장면도 있지 않을까, 형식에 맞추니 드라마 조율에 힘든 점이 있었죠. 내용은 충분히 좋은데 기술적인 부분 때문에 손을 봐야 하는 지점이 생겼죠. 대본을 수정하면, 이 공연의 특성상 모든 부분을 조금씩 바꿔야 하니까요. 그 때문에 치이는 게 공연 직전까지도 있었어요. 첫 공연 전날에도 대사를 다시 써서 주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 어느 한 쪽의 내용이 더 빨리 진행되거나 모자랄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대비도 해야 했고요. 소모적인 작업이 계속됐어요.”

쉽지 않은 공연이기 때문에 한 번 이상은 작업을 해본, 믿을 만한 배우를 썼다고 한다. 지 작가는 “배우 한송희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 번 이상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사람들이다. 김태형 연출가와 나는 작품을 할 때 배우를 믿고 간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더 헬멧’에는 이석준과 정원조, 정연, 손지윤, 양소민, 이호영, 이정수, 김도빈, 윤나무까지 출중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이 뭉쳤다.

“잘 쓰고 싶은 욕심은 더 커지고, 실험하고 도전하고 싶은 지점도 많았어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하는데 서너 개를 뛰어넘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자책도 했죠. 이 과정에서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지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어요. 단순히 흥미 있는 작품이라서 참여했더니 복잡한 구성과 대본에다 ‘룸 서울’의 여성 배우들은 역동적인 액션 장면도 해야 했죠. 무술감독님이 처음에 만든 액션 장면은 지나치게 격렬해서 다들 한동안 편하게 못 걸었을 정도예요. 웬만한 남자보다 더 센 격투 신이어서 극장 연습을 하면서는 부상의 위험 때문에 조금 수정을 했고요.”

배우들은 대본을 완전히 숙지해도 문 넘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오랜 연습으로 단련된 ‘감(感)’으로 흐름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다.

“두 개로 나뉜 방에서 액션과 대사의 싱크를 맞추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정해진 대사나 노래가 나오면 여기서는 이 말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연습을 했죠. 어떻게든 맞추려고 하는데 배우들의 호흡으로 인해 밀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당겨지기도 해요. 배우들은 정말 대단해요. 그걸 해내더라고요. 보통 그쯤 되면 화를 낼 만도 한데, 너무 힘들어서인지 사람이 웃게 되더라고요.(웃음) 배우들이 희생을 해줬고, 다들 훌륭했어요. 제가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연극 '더 헬멧' 공연장면 / 사진제공=아이엠컬처

연극 ‘더 헬멧’ 공연장면 / 사진제공=아이엠컬처

◆ 또 다른 ‘더 헬멧’

“사실 저는 지금까지 쉬운 작업을 한 적이 없어요. 게다가 이번엔 김태형 연출가와 했으니, 배로 힘들어지는 작품이 나온 거죠.(웃음)”

‘더 헬멧’의 제목에는 ‘볼륨 원’이 들어간다. 보통은 시리즈를 예고하는 형태다. 지이선 작가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아꼈다.

“글을 쓸 때마다 느끼는데 저는 재능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글 쓰는 것도 무척 느리고, 싫어해요.(웃음) 그럼에도 ‘더 헬멧’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제가 이번에 잘 해내지 못하면 다음 선수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서예요. 처음 하는 실험인데 그저 그렇게 나오면 도전하려고 했던 누군가가 포기할까 봐 두려웠어요. 모든 제작진과 배우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작품이니까 그들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거듭 말해도 부족하지 않은데 모두 한마음으로 해주셔서 감사해요.”

하나의 공연이 완성되는 건 모두가 힘을 합쳐야 가능한 것이지만, 작가가 대본을 쓸 때는 철저하게 혼자다.

“다들 그럴 건데 책임감과 믿음으로 버텼죠. 혼자 하는 작업이어서 외롭긴 한데 나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잘 해내지 않으면 주저 앉을 확률이 높아요. 그러니까 그 생각을 하면 정신이 좀 들어요. ‘안돼, 해야 돼. 정신 차려야 해’ 되뇌죠.”

특히 시리아 전쟁 이야기는 놓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지이선 작가는 “시리아 화이트 헬멧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여서 꼭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폭탄이 떨어지고 아이들은 죽고, 지금도 전쟁을 하는 나라가 많다. 이 작품은 저항, 투쟁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행위로서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골단 이야기에도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에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녹였다.

“백골단 얘기를 하면서도 마지막에 주인공이 그래요, ‘다치지 않고 싸울 수 있게 하려고 투쟁을 한다’고요. 최근의 촛불 집회나 광장 사람들의 저항은 과거와 달라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래하고 춤추면서 싸울 수 있게 하는 게 투쟁이고, 그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지이선 작가는 계속 저항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어떤 작품을 할 때 스스로에게 ‘공연만이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요. 공연만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하죠. 극은 ‘믿음의 마술’이에요. 그 마법같은 순간을 만들 때마다 하나의 별의 탄생과 소멸을 동시에 보죠. 관객들이 영화, 드라마와는 다르게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먼걸음을 해서 공연을 보러 온다면, 제작진은 어떤 것으로 움직이고 끝까지 살아남을까라는 생각을 해봐야죠. 앞으로도 계속 글 작업을 할 텐데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이렇게 새로운 실험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 여성 중심으로 풀어내려고 마음먹었을 때 지치는 게 가장 무서워요. 어떤 환경에서도 지치지 않길 바라죠. 같이 작업하는 동료들이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