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이 추천하는 이 작품] ‘탠저린’, 아름다운 사람들

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사진=영화 '탠저린' 메인 포스터

/사진=영화 ‘탠저린’ 메인 포스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레즈비언,게이,양성애,트랜스젠더(LGBT) 이슈를 다룬 영화들에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아예 퀴어 영화라고 하는 장르도 있는데 이 역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래도 가끔씩 같은 계통의 영화들이 만들어져 관심을 끌기는 하지만 흥행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훌륭한 주제의식을 가진 문제작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역시 국내에선 레즈비언 코드로 인해 찬밥 취급을 받고 말았다. 빌리 진 킹은 여성해방 업적으로 대통령 훈장도 받고 엠마 스톤이라는 흥행불패의 여배우가 등장했음에도 결과가 시원치 않았던 것이다.

영화 ‘탠저린’(Tangerine, 션 베이커 감독, 극영화·코미디, 미국, 2015년, 88분)의 주인공은 트랜스젠더들이다. 트랜스젠더 하면 아마 한때 TV에 불나게 등장했던 배우 하리수가 떠오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트랜스젠더를 두고 하리수처럼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훨씬 깊은 차원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들어 있다.

크리스마스이브 LA의 어느 거리를 트랜스젠더 신디(키타나 키키 로드리게즈)와 알렉산드라(마이아 테일러)가 걷고 있다. 신디는 마약 소지 혐의로 옥에 갇혔다가 막 풀려나온 처지였고 신디의 절친 알렉산드라는 출소한 그녀를 마중 나왔다.

그런데 옥에 간 사이 신디의 남자친구 체스터(제임스 랜슨)가 다이나(미키 오하간)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두 사람은 체스터를 응징하기 위해 찾아 나선다. 그럴 만도 하다. 신디가 벌을 받은 이유가 마약판매상인 체스터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스터가 어디에 숨었는지 알 도리가 있어야지… 그러니 우선 다이나부터 수소문해야 한다.

알바니아에서 이민 온 라즈믹(카렌 카라굴리안)은 택시 운전사다. 부지런히 일한 덕분에 아내와 딸과 함께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장모님까지 찾아와 크리스마스이브 파티를 할 계획까지 있다.

하지만 오늘은 최악의 날이었다. 손님들이 택시에서 토하지 않나, 노골적으로 멸시하지를 않나, 그의 유일한 위로 수단인 거리의 성을 사는 일도 망쳐버리고 말았다. 라즈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양성애자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오늘 같은 날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알렉산드라를 만나야 한다. 크리스마스이브 파티가 대수인가 말이다.

영화의 기조는 언제 어느 쪽으로 튈지 모르는 상황,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소동극이다. 특히 라즈믹의 장모까지 끼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결국 체스터의 아지트인 ‘도넛 타임’이라는 작은 가게에 신디, 알렉산드라, 다이나, 라즈믹, 체스터, 라즈믹의 장모와 아내와 어린 딸, 가게 주인인 동양 여성까지 나서 경찰을 부를 테니 당장 모두 나가라고 소리를 지른다. 최근에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웃어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난장판이 펼쳐진다. 각본과 연출이 빼어나 그만 혼이 쏙 빠져나가는 줄 알았다. 감독은 이 난리를 어떻게 수습하려는지 궁금해졌다.

‘탠저린’의 마지막 몇 장면이 주는 메시지는 매우 훌륭했다. 특히 이 메시지는 라즈믹의 장모가 날린 간결한 대사 ‘LA는 껍데기만 있는 도시’와 맞물리면서 의미를 더했다. 몸 파는 직업을 가진 신디가 수시로 내뱉는 거칠고 막나가는 욕설과, 카페에서 자기 돈까지 내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알렉산드라와, 그 노래의 가치를 알아주는 다이나가 한쪽만 남은 샌들까지 벗어던지는 모습, 어떤 일이 있어도 가정을 지키겠다는 라즈믹의 아내 등… 그 모든 정황들이 단 한 번에 매듭을 지었다. 관객들은 가발이 갖는 상징성에 주목하길 바란다.

탠저린(귤)은 서양에선 비교적 낯선 과일로, 이국적인 맛을 주는 고급 과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오렌지에 비하면 볼 품 없는 모양새를 가졌지만 안에는 적도에서나 맛볼 수 있는 달콤함이 숨어있다. 그런데 껍데기만 남은 사회에서 어떻게 그 과일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편견이 머리에서 사라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션 베이커는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감독이다. ‘탠저린’은 영화 전체가 아이폰으로 촬영되었기에, 고정된 시선보다는 흔들림을 전제로 하는 ‘핸드 헬드’ 기법을 주로 따른다. 그래서 그런지 클로즈업과 일상성을 담아내는 눈높이의 화면 전개가 손놀림처럼 자유자재로 이루어진다.

손전화기로 촬영된 영화를 몇 편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독창적인 경우는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아이폰으로 영화를 찍었으니 당연히 제작비가 축소되었을 테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실제 트랜스젠더를 발탁해 배우로 삼았으니 당연히 실험적인 작품일 테고.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시간 범위로 잡았으니 당연히 응집력이 있을 터다.

독립영화를 지원하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주목 받았고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10대 영화’ 반열에 올랐다. 마침내 영화 자체가 아이폰 박물관에 전시되는 것도 당연한 결과다.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박태식(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