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훈 감독│다양한 형태의 진정성이 담긴 드라마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꼭 ‘그 때’였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한국 드라마가 ‘막장’의 파도에 휩쓸리기 전의 마지막 나날이었던 2007년 여름의 MBC <메리대구 공방전>과 겨울의 KBS <얼렁뚱땅 흥신소> 같은 작품들이 그렇다. 특히 자칭 루저, 그러나 각기 다른 사연과 개성을 지닌 ‘동네 히어로’들의 일상과 황금 찾기라는 판타지를 절묘하게 접목시킨 <얼렁뚱땅 흥신소>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허허실실의 기운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자화상을 누구보다 또렷하게 그려낸 드라마였다.

“요즘 IPTV를 달아서 방송 이후 처음으로 다시 보고 있는데 재미있다. 여전히, 기억되어야 할 만큼 잘 쓴 대본이라 생각하지만 거기에 ‘기억되어야 할 만큼’ 잘 한 연출이 따라붙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웃음)” <얼렁뚱땅 흥신소>의 낮은 시청률 때문에 종영 후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는 함영훈 감독은 자신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면서도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그냥, 그 인간들을 보고 있는 게 행복하다”며 솔직한 애정을 털어놓는다. 97년 KBS 입사 후 13년 동안 드라마를 만들어오며 가장 큰 칭찬으로 여기는 말이 신입 조연출 시절 배우 하희라로부터 들은 “함영훈 씨가 일하는 태도나 사람들 대하는 방식을 보면 표민수 감독님이 생각난다”라는 것만 봐도 사람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극장에 다녔고, 재수 시절을 영화잡지 <로드쇼>의 창간과 함께 보냈으며, 점심값을 아껴 영화를 보러 다니던 대학 시절을 지나 방송국에 입사한 뒤 그는 5년 내내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현장 조연출로 살았다. 휴직을 하고 1년 동안 미국에 다녀온 뒤 다시 몇 편의 미니시리즈 조연출을 거쳐 내놓은 작품이 <드라마시티> ‘반투명’이었다. 자라면서 장수봉-박진숙, 황인뢰-주찬옥, 고석만-김기팔 등 다양한 감독-작가 콤비의 작품들을 모두 좋아했고 ‘일류 B급’을 지향하며 문화의 힘은 다양성에서 나온다고 믿는 이 잡식성의 감독이 고른 드라마들은 다음과 같다.

美 <에브리바디 러브즈 레이몬드>
(Everybody Loves Raymond)
1996~2005년

“미국에서 지낼 때 하루 세 번씩 재방송했던 시트콤이라 열심히 봤는데 의외로 한국적인 정서가 기억에 남는다.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가장 레이몬드(레이 로마노)의 가장 큰 고충은, 그의 앞집에 장가 못 간 형과 성격 특이한 부모님들이 살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간섭한다는 거다. 그래서 무려 10년이나 방송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이 바로 레이몬드를 사이에 둔 아내와 시집 식구들, 특히 시어머니와의 고부 갈등이라는 게 재미있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살림 실력을 자랑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요리 솜씨를 샘내면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보며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KBS <학교>
1999년, 연출 이민홍, 극본 김지우

“<학교>는 내가 조연출을 맡았던 작품이었다. 첫 회의 때 ‘모범생이건 날라리건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옆에서 친구나 선생님, 가족들이 어떻게 돌봐주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를 했던 게 떠오른다. 당시 우리의 신념은 절대 청소년이나 학교를 상품화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방송되고 나서는 50년 가까이 교육계에 종사하셨던 아버님께서도 ‘괜찮다’는 말씀을 해 주셨고, 시청자 게시판에 ‘아이들에게 질려 교직을 그만뒀다. 그런데 <학교>에서 신구 선생님이 연기하신 노교사의 말씀을 듣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로 했다’라는 글이 올라왔을 때 우리의 진심이 통했다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정말 보람을 느꼈다. 지금도 여전히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쓰려면 그 공간에 대한 이해와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日 <장미가 없는 꽃집> (薔薇のない花屋) 후지 TV
2008년

“부인이 죽은 뒤 조그만 꽃집을 하면서 혼자 딸을 키우는 남자(카토리 싱고) 앞에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맹인 행세를 하는 여자가 나타나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이상해 보일 정도로 순수하고 소박하게 사는 주인공을 보며 문득 자아성찰이란 걸 하게 됐다. 우리는 누구나 하루에도 100가지쯤 크고 작은 선택을 하며 사는데 그 때 마다 자기가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영리한 선택을 하려고 본능적으로 애쓰지 않나. 그러다가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서글퍼질 때도 있고. 그런데 이 작품은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줬다.”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요즘 함영훈 감독은 8월 방송 예정인 8부작 <전설의 고향> 프로듀서를 맡아 일하고 있다. “프로듀서란 대개 ‘돈을 맞추는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연출, 작가, 배우 및 모든 스태프들과 일하며 상황을 조율하고 드라마를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게 지원하는 프로듀서의 업무에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제1덕목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 믿는다는 그는 여전히 바쁘다. 그리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이 찍고 많이 써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열심히 사는 것만이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에게는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 올 하반기 부활 예정이었던 KBS 단막극을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되살려 내는 것이다. 당장 표 나는 일은 아니지만 드라마의 다양성이라는 기반을 만들어놓기 위해 함영훈 감독은 어떻게든 이를 성사시키려 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인생의 선배로 여겼던 배우 故 박광정이 즐겨 쓰던 말은 요즘 그의 인생 모토가 되었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는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기를,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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