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칸 황금종려상 문병곤 감독, ‘병곤이 형’의 영화 이야기

<세이프> 문병곤 감독

<세이프> 문병곤 감독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조심스럽다. 본인이 하는 말이 건방져 보이지는 않을지. 그리고 항상 경계한다. 진짜 속마음을 과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허세를 부리고 있지는 않은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단편)을 받고 나면 좀 우쭐하거나 거만해질 법도 한데, 문병곤 감독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겸손했다. 영화 <세이프>의 주제가 ‘금융 자본주의’지 않냐고 묻자, 너무 거창하다며 ‘돈 이야기’로 써 달란다. 영화감독이라기보다 어디에나 한 명씩 있을 법한 동네 형의 느낌이었다. 그것도 아주 만만한 형. 하지만 만만해 보이는 ‘병곤이 형’도 영화 얘기를 할 때는 진지했다.

Q. 황금종려상 수상 기자회견 때 바지가 구겨져 있는 걸 보고 좀 놀랐다. 원래 옷에 신경을 안 쓰는 타입인가.
문병곤 : 그날 원래는 반바지를 입으려고 했다. 다들 미쳤냐고 하더라. 어른들 오시는데 재킷이라도 하나 걸치라고…. 원래 신경을 좀 안 쓰는 편이긴 하다.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다른 일에 집중하는 걸 좋아해서 옷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쓴다.

Q. 수트도 이번 칸영화제 때문에 처음 샀다고 들었다.
문병곤 : 그걸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어색할 것 같아서 고민을 많이 했다. 난 평소에도 어설프게 차려입느니 안 입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턱시도는 약간 어중간하지 않나. 돈도 아깝고. 그래서 안 사려다가 저녁에 뤼미에르 극장에 들어가려면 입어야 된다고 해서, 결국 샀다.

Q. 기자회견장에서 봤을 때도 그렇고 수더분하고 털털할 것 같은 인상이다. 영화에서 받은 느낌이랑은 좀 다른데.
문병곤 : 일할 때는 다르다. 평소엔 날 풀어놓고 생각도 많이 안 하고 산다. 그런데 일할 때는 금전적으로든 영화의 완성도로든 성과를 내야 하지 않나. 영화는 혼자 찍는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모여 희생을 했으면 최대한의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할 때 나에게 실망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사람 좋아 보이는데 일할 때 보면 아니라고…. 좀 집요한 면이 있다.

Q. 사람들이 좀 실망하더라도 치밀함과 집요함은 감독에게 필요한 부분 아닌가.
문병곤 : 그렇긴 한데, 사람들을 괴롭히면 그만큼 합당한 보상을 내가 해야 한다. 돈으로든 작품으로서의 성과로든.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 보상이 없었다. 정당한 성과도 없이 내 고집을 부리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런 게 미안했다.

Q. 칸 영화제 수상은 처음이다 보니 많이 놀랐을 것 같다.
문병곤 : ‘큰일 났다’ 싶었다. 대학 동기들도 부러운 범위를 넘어서서 ‘이제 너 어떡할래?’ 그러더라. 내 입장에서도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황이다 보니…. 많이 생각을 해 보고 내린 결론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나를 어필하자는 거다. 기자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방송에도 출연하고 이런 것들 전부 나에겐 새로운 경험이다. 친구들은 좀 아니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거 해보나 싶어서 다 열심히 하고 있다. 지금 상황에 최대한 집중하고, 그 후에 최선을 다해서 다음 작품을 찍는 게 맞겠다고 판단했다.

Q. 방금 말한 것처럼 수상 이후에 주변 환경도 달라지고, 영화계 원로들의 찬사도 쏟아졌다. 부담도 되겠지만, 좀 우쭐해질 것 같은데.
문병곤 : 우쭐하기보다는 좀 덜 당황하게 된 것 같다. 다 새로운 경험들이라서, 너무 당황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부담도 되지만 그런 칭찬들이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동기 부여도 되고. 사실 영광이지 않나 내 입장에서는. 그런데 지금의 찬사들은 ‘잘했다’는 칭찬일 뿐이고, 말하자면 밥 한 번 사준 느낌이다. 다음에 더 잘하려면 반드시 겸손해져야겠지. 모든 걸 잊고 맨땅에 헤딩하듯 다시 해야겠지.

문병곤 감독, 영화 <세이프> 스틸

문병곤 감독, 영화 <세이프> 스틸

Q. 영화를 찍게 된 계기가 있나.
문병곤 : 졸업할 땐 사실 영화보다 취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학년 때까지는 연출이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막연히 영화를 찍으면 재밌겠다는 생각만 했다. 좀 웃긴 건, 그 당시에 ‘칸이나 베를린 같은 세계 영화제에서 수상하면 군 면제’라는 헛소문이 있었다.(웃음) 그 말을 듣고 ‘오, 이거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영화감독에 대한 생각은 그 정도로 막연했고, 구체적인 목표는 없었다.

Q. 졸업 후 아르바이트에 뛰어든 것도 취직을 염두에 둔 거였나.
문병곤 : 맞다. 졸업작품 <불멸의 사나이>를 찍기 전부터 ‘이걸로 성과가 없으면 재능이 없는 거라고 생각하자’고 내 자신을 타일렀다. 찍고 보니, 역시 성과가 없더라. 그래서 취직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CJ E&M에 필라멘트라는 회사에서 10개월 정도 인턴으로 일했는데, 결국 정직원도 못되고 회사를 나왔다. 다시 GS shop, 엘리베이터 회사, 홈쇼핑 회사 같은 곳에 서류를 넣던 중에 <불멸의 사나이>가 칸에 초청된 거다. 칸에 갔다 와서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민하던 중에, 광고도 어차피 영상을 다루는 곳이다 싶어 광고회사 두 군데에 지원했는데 역시 다 떨어졌다. 남은 건 영화밖에 없었다. 7분짜리 1인극 <불멸의 사나이>로는 장편영화 감독으로서 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없을 것 같더라. 그 때 생각난 게 권오광이라는 친구의 시나리오 <한 평짜리 혐오>였고, 그걸 각색한 게 <세이프>다.

Q. 아, 원작이 있었나. 원작의 내용도 궁금하다.
문병곤 : 원작도 환전소라는 공간과 등장인물은 같다. 하지만 기획의도가 전혀 다르다. 원작에서 환전소가 의미하는 건 ‘대학’이다. 대학에 다닐 때 좁은 구멍으로만 세상을 보며 혐오하던 이가 정작 사회로 나와서는 다시 대학으로 도피하려 한다는 이야기다. 그에 반해 <세이프>의 주제는 ‘돈’이다. 나가려고 할수록 다시 되돌아오게 된다는 패턴은 같지만 나머지는 많이 다르다. 그러다 보니 각색도 많이 했고, 결말도 원작과 다르다.

Q. 돈 문제에 대해 평소부터 관심이 많았나.
문병곤 : 아무래도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우리나라는 특히 IMF도 겪었지 않나. 워렌 버핏 같은 주식의 귀재들을 보면서 저 많은 돈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이 정도의 일확천금은 없었던 것 같은데…. 물론 돈은 꼭 필요한 거다. 하지만 점점 돈에 의존하게 되니까, 이래도 괜찮을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돈은 도구라고 생각한다. 망치로 무엇을 만드느냐가 중요하지 망치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지금은 너무 수십, 수백 개의 망치를 모으는 데만 집중하니까, 앞뒤가 바뀐 느낌이 들더라.

Q. 기자간담회에서 ‘아이러니’라는 전달방식을 강조했다. <세이프> 속 아이러니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문병곤 : 아이러니는 ‘사즉생, 생즉사’나 ‘창과 방패’ 이야기처럼 상당히 개념적인 거다. 계획한대로 흘러가지 않고, 그 계획 때문에 결국 그 계획과 반대되는 상황을 맞는다. 이게 바로 아이러니고, 내가 재밌어 하는 이야기 종류다. <세이프>의 핵심 이야기도 ‘나가려고 하다가 나가려는 그 의지 때문에 더 깊은 곳으로 빠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내 생각엔 이야기 자체가 아이러니다. 지어낸 이야기는 사실 다 거짓말인데, 그 거짓말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니까.

Q. 영화를 보는 13분 동안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서스펜스에 대한 고려가 특별히 있었나.
문병곤 : 당연히 긴장감을 고려했다. 영화에 나오는 효과음이 점점 커진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카운터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 돈 세는 소리, 망치 소리까지. 남자의 조급함, 돈의 조급함을 소리로 표현하고 싶었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그게 더 긴장되고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할 수 있으니까. 소리에 많이 의지했다.

문병곤 감독

<세이프> 문병곤 감독

뉴질랜드의 영화감독 제인 캠피온은 1986년 영화 <과일 껍질>로 단편 부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 후 7년 뒤 그녀는 영화 <피아노>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은 제인 캠피온 감독과 문병곤 감독을 비교하며 문 감독의 앞날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정작 본인은 그 말을 들었을 때 민망해서 숨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한 기대를 받을 때마다 ‘다음번에 상을 못 타거나 칸에 못 가도 좌절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는 문병곤 감독.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문 감독에게 중요한 건 상이 아니었다.

Q. 다른 인터뷰에서 “입봉한 감독님들은 다 대단하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나.
문병곤 : 영화를 만든다는 게 정말 많은 합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작업이고, 굉장히 힘든 일이다. 어떤 일이든 다 그렇겠지만, 아무래도 연출을 하면 장기간에 걸쳐 준비하니까 기회가 한번뿐인 경우가 많다. 승부수를 띄워야 하는 거지. 흥행이나 수상을 다 떠나서 그걸 이뤄내기 위해 사람들이 했던 노력은 충분히 본받을 만하고 나도 그 점을 존경한다. 그냥 열심히 해서도 안되고 운이 따라야 하는 거다. 어떤 영화든지 그런 고민 없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없다.

Q. 장편영화를 꿈꾸며 단편영화를 찍어왔는데, 둘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
문병곤 : 단편은 아무래도 수익 면에서 장편과 비교가 안 된다. 장편은 제작비 이상의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수익이 우선시되는 것 같다. 하지만 단편은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찍을 것인지 고민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의 판단대로 질러볼 수 있는 기회.

Q. ‘좋은 영화’는 어떤 영화라고 생각하나.
문병곤 : 좀 추상적이긴 한데,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를 가장 좋아한다. 상업영화든 예술영화든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사실 다른 일들도 그렇다. 처음에 뭔가가 되고 싶었을 때 그 계기가 있듯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Q. 본인을 ‘영화감독이 되고 싶게 만든’ 영화는 뭐였나.
문병곤 : 어렸을 때 토요명화, 금요명화 같은 프로그램을 많이 봤다. 이야기라는 게 이렇게 재밌구나, 생각했던 건 그 중에 <보물섬>이라는 영화다. 사실 제목이 <보물섬>인지도 확실히 모르겠다. 그게 <인디아나 존스>였던 것 같기도 하고. <인디아나 존스>는 심지어 지금 봐도 신나니까.

Q. 요즘은 감독도 연기를 하고, 배우도 연출을 하는 경우가 많다. 배우 욕심은 없나.
문병곤 : 영화감독으로서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연륜이 생긴다면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 오십대쯤? 좀 나이가 들었을 때 배우를 해보고 싶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지금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힘들지만, 그 때가 되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감독과 배우의 경계가 명확하게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영화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양한 일을 해 보고 싶다. 배우가 사실 굉장히 힘든 직업인데, 연기를 해보면 연출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Q. 기자회견 때 ‘일단 지금은 열심히 인터뷰하고, 나중에 영화 찍을 때는 내가 잘 하면 되는 거니까 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자신감도 느껴지고.
문병곤 : 그 때 그 말로 잘 넘어간 것 같다.(웃음) 내가 지금 마스터피스 운운할 때는 아니지 않나. 많이 부딪치고 깨져봐야 할 것 같다. 질책도 많이 받겠지만 그래도 부딪쳐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금은 좋은 게 뭐냐면, 취직이냐 영화냐를 놓고 갈등했던 때에 비해 옵션이 단순해졌다는 거다. 이젠 장편영화를 찍겠다는 목표뿐이다. 잘 못해도 할 수 없다. 후회만 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원래 하던 대로 그냥 열심히.

글. 기명균 kiki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