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이 추천하는 이 작품] ‘조용한 열정’, 시인과 한 인간으로서의 삶

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사진=영화 '조용한 열정' 메인 포스터

/사진=영화 ‘조용한 열정’ 메인 포스터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은 한두 번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평생 고향인 애머스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 반경은 집과 동네 산책로 정도에 불과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직업을 가진 적도 없었기에 그녀의 삶은 조용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노래한 시들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난 연애 사건은 없다. 밋밋하리만큼 잔잔해 보이는 이 여성 시인의 삶이 실은 들끓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의 내면은 늘 커다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나 계절마다 옷을 바꿔 입는 드넓은 초원처럼 변화무쌍했다.

과작(寡作)으로 알려진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은 에밀리 디킨슨의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열정’을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화면으로 담아냈다.

영화의 첫 대사는 “구원받기를 원하는가?”다. 에밀리가 잠시 다녔던 여자신학교에서 원장이 학생들에게 묻는 말이다. 다른 모든 학생들은 구원을 원한다고 답하지만 유일하게 에밀리 디킨슨만이 거부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선 먼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하는데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럴 만한 죄가 없기 때문이다. 에밀리는 “실망스러울까봐 천국이 두렵고” “지옥도 견뎌야 한다면 견디겠다”는 불경스러운 언행을 하지만 누구보다 신의 존재를 궁구하고 영원에 대해 사색한 인물이다.

/사진=영화 '조용한 열정' 스틸컷

/사진=영화 ‘조용한 열정’ 스틸컷

그녀가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감정도 의무라고 윽박지르는 종교적인 억압이었다. 에밀리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가풍을 가진,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중산층 집안에서 자랐다. 부모님의 신뢰와 형제 간의 우애가 있었기에 남다른 사고방식을 갖고도 외롭지 않게 성장할 수 있었다.

에밀리는 ‘스프링필드 리퍼블리컨’이라는 신문에 처음 시를 싣게 된다. 시에 대한 에밀리의 열정은 대단했지만 세상은 그녀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재능 있는 여자 문인들은 생각, 감정, 공상은 풍부하지만 가난하고 외롭고 불행하다. 그렇다 보니 건강할 수 없다.” 스프링필드 리퍼블리컨 편집장 보울즈의 이와 같은 논평은 에밀리를 크게 실망시켰다.

보울즈의 말처럼 에밀리는 외롭고 어찌 보면 불행했다. 하지만 그녀의 외로움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외로웠기에 그녀의 시는 빛날 수 있었다. 에밀리는 자신의 시적 재능을 인정해 주는 유부남 목사 워즈워스를 흠모했지만 짧은 인연으로 마감되었다.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인연은 시(詩)가 되어 남았다. “일 년 뒤 그대 오신다면/각 달을 공처럼 말아/서랍에 넣을게요/때가 올 때까지”

자신감 넘치고 위트 있던 에밀리였지만 세월의 풍파는 그녀를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으로 바꿔놓게 된다. 삶과 시를 맞바꾼 시인의 숙명이 느껴지는 슬픈 대목이다.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은 에밀리의 시를 중심에 놓고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사 위주로 영화를 구성했다. 말과 글이 주가 되곤 있지만 영상 미학도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가령 시간의 흐름과 에밀리 가족의 변모를 증명사진 구도로 잡은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줌인되는 카메라는 불필요한 설명을 생략하고 세월을 건너뛴다. 가족의 저녁 풍경을 담은 화면은 마치 인상주의 회화처럼 느껴진다. 의상, 음악 등 어느 것도 허술하지 않은 격조 높은 시대극이다.

브론테 자매를 좋아한 에밀리 디킨슨의 삶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기는 미국의 격동기였다. 에밀리의 삶을 따라가고 있지만 영화에서 다루는 주제는 굉장히 폭 넓다. 노예제도, 여성문제는 물론이고 종교, 문학 등 19세기 미국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에밀리 디킨슨은 여동생 비니의 말처럼 스스로에 대해 너무 높은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높은 기준은 고결함이 되기도 하지만 편협함이 되기도 해서 세상과 불화를 초래하게 된다.

에밀리 디킨슨은 기꺼이 불화를 감당하면서 세상이 내미는 손을 잡지 않았다. 한 인간으로는 불행한 일이지만 시인으로서는 패배하지 않은 삶이다.

이현경(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