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이 추천하는 이 작품] 인간의 기억이라는 건…‘당신과 함께 한 순간들’

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매주 1회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명으로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사진=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포스터

/사진=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포스터

‘당신과 함께 한 순간들’은 의외로 SF 장르에 속하는 영화다. SF영화 하면 떠올리게 되는 화려한 볼거리나 파격적인 설정은 없지만 인공지능이 죽은 사람 역할을 한다는 기본 아이디어가 SF 요건에 들어맞는다.

조던 해리슨의 희곡을 원작으로 삼다 보니 영화는 대부분 실내에서 오가는 대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역시 SF에 관한 고정관념과 어긋난다. 하지만 미래사회에서 인간이 기억이나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고전적인 SF 영화들과 일맥상통한다.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85세의 마조리는 딸과 사위가 마련해준 인공지능 ‘마조리 프라임’과 대화를 나눈다. 컴퓨터 프로그램인 ‘마조리 프라임’은 사별한 남편 월터의 역할을 하게 입력되어 있으며 대화를 통해 정보가 쌓이면 딥러닝을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주문자의 요청에 맞춰 고인의 특정시기 모습을 보여주는 홀로그램으로 구현된다. ‘마조리 프라임’ 홀로그램에서 월터는 40대 모습으로 설계되었다. 홀로그램이므로 만질 수 있는 육체가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보다 더 큰 한계는 한 가지 모습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억은 학습에 의해 수정되거나 확대되지만 홀로그램의 외모는 고정되어 있다.

/사진=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스틸컷

/사진=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스틸컷

주요 등장인물인 마조리, 딸 테스, 사위 존의 기억은 제각각이다. 테스와 존이 나누는 대화처럼 기억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니라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일 뿐이다. 그 마지막 순간조차 끊임없이 조금씩 유실되고 덧칠되어 기억은 복사본의 복사에 불과하다.

마조리와 인공지능 월터가 처음 대화를 나눌 때, 둘은 젊은 시절 키웠던 개에 관해 길게 이야기한다. 처음 키운 개 토니와 두 번째 키운 토니2세에 대해 즐거운 추억을 공유한다. 처음에는 시시해 보이던 개 이야기가 영화 중반과 후반에 가면 점차 중요한 기억의 단서라는 게 밝혀진다. 사실 토니는 마조리와 테스가 말하기도 기억하기도 싫어하는 아들이자 오빠인 데미안의 기억을 열수도 덮을 수도 있는 얇은 차양막 같은 것이다.

인공지능 월터에게 정보를 주고 학습을 돕는 주 역할을 맡은 인물은 사위 존이다. 마조리와 테스가 감추고 싶어 하는 기억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자 둘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제3자인 존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32개 언어를 알고 있으며 엄청난 검색 능력을 갖고 있는 인공지능이지만 인간 개인의 추억은 입력하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마조리는 딸에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니 얼마나 좋아.”라고 말한다.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대사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여기 담겨 있지 않다. 딸이 기억하는 엄마는 좋은 바이올린 연주자였지만 단호한 무신론자에다 자식을 살가운 애칭으로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월터가 청혼한 날 둘이 본 영화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었지만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그걸 기억하지 못하고 ‘카사블랑카’를 봤다면 좋았을 거 같다고 말한다. 따라서 85세 마조리가 전하는 말은 진짜 과거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현재의 소망일 수 있다.

‘당신과 함께 한 순간들’은 생각하기 따라서 잔인한 영화다. 영화 속 대사처럼 “모든 인간관계는 불가능”하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인간은 유한하고 기억은 왜곡되어 있으며 그 기억조차 사라지지만 인공지능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기억을 축적할 수 있다. “시간이 많으니까요”라는 대사는 오직 인공지능에게만 허락된다. 그렇다고 꼭 슬퍼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유한한 시간 안에서 예측불허의 행동을 하고 기억을 왜곡하는 불합리한 모습이야말로 진정 인간적인 것이며 인공지능이 당분간은 다다르기 힘든 영역이니까.

이현경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