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 배우 이정재의 영화관

 

강렬하고 잘빠진 남성미를 부드러움으로 감싸며 여심을 사로잡아온 배우 이정재. 그의 연기엔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은 ‘젠틀함’이 묻어난다. 타락한 청춘의 비극적 말로를 그려냈던 ‘어딘가 정제되지 않았던’ 그의 연기는 데뷔 20년 세월의 흔적을 아로새기듯 연륜을 담아낼 수 있게 됐다. 흥행의 ‘성공과 실패’를 오갔지만 넓어진 연기 스펙트럼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소화해 왔기에 얻을 수 있었던 소득이다. 배우 이정재,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영화들을 돌아봤다.

<젊은 남자>

욕망과 야망이 들끓는 도시 서울. 젊은 남자 이한(이정재)는 3류 모델이다. 돈 좀 있다는 또래 여성들과 ‘쉬운 사랑’을 나누던 한에겐 재이(신은경)도 그런 여성 중 한명이었다. 그러던 중 한은 부유하고 지적인 승혜(이응경)에게 급속도로 빠져들고, 한이 소속된 에이전시의 여자 매니저 손 실장(김보연)까지 관계가 얽히기 시작하는데…
10. 1994년 개봉된 <젊은 남자>는 이정재를 세상에 알린 첫 작품. 영화 첫 주연작으로 이정재는 이 영화로 신인상을 휩쓸었다. 사실 이 영화는 흥행에도 실패했고, 비평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화제만큼은 대단했다. 폼 나게 살고 싶은 젊은 남자 캐릭터를 제대로 살려서 랄까. 영화 포스터에는 이러한 문구가 적혀있다. “모든 젊음은 충동한다!” 영화에 대한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할까. 이때 획득한 ‘열정적이며 매력적인 젊은 남성’의 이미지는 이후 드라마 <느낌>(1994)으로 이어지며, ‘하이틴 스타’ 발돋움 하는 계기가 됐다. 드라마 <종합병원> 등을 통해 서서히 이름을 알리던 신은경의 출연도 관심 대상이었고, 한 때 충무로를 주름잡던 배창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사실도 큰 주목을 끌었다.

 

<태양은 없다>

후배 권투선수에게 K.O로 패한 도철(정우성)은 권투를 그만두고 찾아간 흥신소에서 홍기(이정재)를 만난다. 무언가를 해보려하지만 하는 일마다 꼬이는 두 남자. 도철의 ‘펀치 드렁크’ 증세는 점점 심해지고, 홍기는 자신의 도벽을 고치지 못해 상황만 자꾸 악화시킨다. 홍기는 병국(이범수)과 담판을 지으려하지만 병국은 이를 거부하고, 홍기·미미(한고은) 모두와 결별을 고한 도철은 극심한 펀치 드렁크 증세에도 다시 링에 오른다.

10. 드라마 <모래시계>(1995)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 후 한동안 침체기를 겪게 된다. <모래시계>의 재희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던 탓에 한 동안 이를 넘어설만한 캐릭터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던 것. 때문에 이정재에게 있어 1998년 개봉된 <태양은 없다>는 여러모로 큰 의미를 지닌 중요한 작품이다. 제20회 청룡영화상에서 생애 첫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친구 정우성을 만났다. 이정재는 정우성과의 오랜 친분으로 인해 ‘사귄다’는 뜬소문이 날 정도. ‘거친 마분지’와 같은 영상 속엔 계속해서 < Love Potion No.9 >의 경쾌한 멜로디가 흘렀고, 이정재와 정우성은 ‘90년대 젊은 청춘’을 대신해 뛰고 또 뛰었다. 특히 이정재는 까불까불하며 “인생 따위 알게 뭐야!”라고 말하지만 실제론 삶의 무게의 짓눌려 웃는 얼굴 속에 슬픔을 녹여내는, 그야말로 실제로 ‘20대’를 살아가던 그만이 할 수 있는 연기였다. <태양은 없다>의 성공으로 그는 연기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선물>
5년차 무명 개그맨 용기(이정재)와 이유 없는 냉전으로 남편에게서 자신을 점점 닫아만 가는 용기의 아내 박정연(이영애)은 결혼 3년차다. 우연히 용기는 정연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게 되고, 용기는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었던 그녀에게 마지막 추억을 찾아주려 한다. 그와 동시에 용기는 점점 마지막 시간이 가까워져가는 아내를 위해 이 세상 단 하나뿐인 ‘그녀만을 위한 쇼’를 준비한다.

10. 2001년 개봉된 <선물>은 이정재의 성숙해진 연기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태양은 없다>까지 줄기차게 이어지는 그의 이미지는 ‘청춘’이었다. 그러나 <정사> 이후 이정재는 더 이상 청년이 아니었다. ‘남자’로 돌아온 그의 눈빛은 한층 깊어져있었다. 눈빛연기가 가능해지자 운신의 폭도 넓어졌다. <인터뷰> <시월애> <순애보> 등 2000년에만 3편의 멜로영화에 출연하며 감성을 닦아온 결실이 <선물>에서 빛을 봤다. 흥행의 아쉬움이 있지만 담담하게 풀어 낸 그의 눈빛만은 ‘아련한 무언가’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선물>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흥행에도 성공했고 그만이 할 수 있는 연기가 무엇인지도 증명해냈다. ‘용기’에겐 깊은 눈빛뿐 만아니라, 가벼운 듯 경쾌한 이정재만의 캐릭터도 살아있었다. 신인시절 김태희, 카메오로 출연한 이수근 김병만 콤비도 볼 수 있다.

<태풍>

어릴 적 남한에 귀순하려 했으나 중국과의 관계를 의식한 한국정부에 의해 북송된 후 가족이 몰살당한 씬(장동건). 그는 한반도를 날려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가다 리시버 키트를 손에 넣고 그의 오랜 계획을 실행하려 한다. 한편 비밀리에 파견된 해군 대위 강세종(이정재)은 씬의 흔적을 뒤쫓다 러시아까지 추적 망을 좁혀간다. 하지만 추격을 거듭할수록 서로에 대해 알게 되자 세종의 마음속엔 씬에 대한 연민이 자리 잡게 되는데…

10. 2005년작 <태풍>은 전형적인 한국식 액션대작의 공식을 따랐다. <친구>(2001)로 한때 대한민국 흥행역사를 갈아치운 곽경택 감독의 작품이기도 했고, 개봉 전부터 장동건 이정재라는 걸출한 두 남자 배우의 대결구도로 관심을 끌었다. <해안선>(2002) 이후 ‘거칠고 강한 남성’의 이미지를 구축해온 장동건은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나타나 색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제작 초기부터 엄청난 관심을 불러 모았다. 미디어를 대상으로 한 촬영 현장 공개에는 국내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취재진이 팬들처럼 몰려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촬영 내내 화제를 몰고 다녔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진 못하며 다소 아쉬운 흥행 성적을 남겼다.

<오버 더 레인보우> <오! 브라더스>

10. <오버 더 레인보우>(2002)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장진영과 호흡을 맞췄다. 영화 <선물>에서 발견한 ‘이정재’스러운 연기바통을 넘겨받은 수작이었지만 2002년 ‘월드컵 열풍’의 장벽을 넘진 못했다. 전 국민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나섰고 극장가는 텅텅 비었다. 장진영이 한창 물오른 연기를 펼친 것과 더불어 이정재의 눈빛에는 ‘특유의 애잔한 감성’이 녹아있었지만 안타깝게 묻혀야 했던 작품이다.

10. <오! 브라더스>(2003)에선 이정재와 이범수가 5년 만에 다시 만났다. 입장도 바뀌었다. <태양은 없다>에서 이정재를 사지로 몰아넣었던 이범수는 ‘조로증(早老症)’에 걸린 동생 봉구로 분했다. 간간히 코미디 연기에 도전했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본 것일까. <오! 브라더스>의 ‘불륜 사진 전문 찍사’ 상우(이정재)의 연기에는 위화감이 없었다. ‘코미디’와 ‘한국형 드라마’의 경계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흥행감독 김용화의 탄생을 알리기도 했던 작품이다.

글.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편집.홍지유 jiyou@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