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 씨, 앞으로도 ‘핑크치킨’으로 위안 받아도 괜찮아요

봉선 씨, 앞으로도 ‘핑크치킨’으로 위안 받아도 괜찮아요
봉선 씨, 앞으로도 ‘핑크치킨’으로 위안 받아도 괜찮아요
사포처럼 까칠하기만 할 줄 알았던 열혈 순경 차봉선(이지아) 씨가 밤이면 밤마다 인기 아이돌 ‘핑크치킨’(이기광)과 꿈속을 헤매고 있다니, 아마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이 그 사실을 알면 경악을 금치 못하겠죠? 경찰서 앞에서 불공정 인사고과 개선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불사하던 장면과 아이돌을 껴안고 잠든 핑크 무드 물씬한 침대 장면이 도무지 매치가 되어야 말이죠.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팍팍한 기색으로 봐서 음유시인 김광석이나 어어부 밴드를 좋아한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백번을 양보한대도 이적이라든가 루시드폴 같은 뮤지션이라면 또 납득이 갈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가사의 질이며 가창력부터 엄청 따지고 들 것 같은, 아니 아예 연예인에 목을 매는 처자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 싶었던 봉선 씨가 숨은 아이돌 마니아였다니요. 브로마이드를 머리맡에 떡하니 붙이고 로맨틱한 꿈까지 매일 꾼다면 그건 보통 수준의 팬이라고 볼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꿈속의 ‘핑크 치킨’은 시종일관 곤혹스러운 표정이더군요. 하기야 밤마다 그 친구가 감당해야 하는 처자들이 좀 수두룩하겠습니까.

까칠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봉선 씨 참 따스해요
봉선 씨, 앞으로도 ‘핑크치킨’으로 위안 받아도 괜찮아요
처음엔 천부당만부당한 설정이라 여겼습니다. 환상 따위에 젖을 차 순경이 결코 아니라고 봤기 때문인데요. 차차 봉선 씨를 알아 가는 사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하네요. 봉선 씨의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이 차차 가슴에 와 닿고 있거든요. 문제의 1인 시위 덕에 징계와 심리치료 중 택일하라는 상사의 권유를 받고 봉선 씨는 어쩔 수 없이 마루타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격 테스트를 해봤더니 봉선 씨는 의외로 ‘JSFP’, 즉 ‘가장 따뜻한 유형’이었어요. ‘말없이 다정하고 양털 안감을 넣은 오버 코트처럼 속마음이 따뜻하고 친절하다’라는 뜻밖의 결과였죠. ‘상대방을 잘 알게 될 때까지 이 따뜻함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또한 동정적이며 자기 능력에 대해서 모든 성격 유형 중에서 가장 겸손하고 적응력과 관용성이 많다’라고도 했죠? 그래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투며 눈길은 늘 가시가 돋쳐있었지만 실제로 봉선 씨에겐 따스한 면이 참 많았습니다.

빨리 팔아치우고 기다리는 손자나 보러 갔으면 좋겠다는 재래시장 난전의 할머니가 안쓰러워 별 필요도 없는 참게를 떨이로 다 사주는가 하면 ‘언더커버 보스’ 서재희(윤시윤)가 당장 이번 달 월세가 없다고 죽는 소리를 해대자 그를 위해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기도 했죠. 무엇보다 싫다, 싫다 하면서도 아버지(길용우)의 전처(김지숙) 소생 김달(서효림)을 매몰차게 내치지 못하는 걸 보면 겉만 고슴도치 모양 뾰족하지 실은 마음은 연두부처럼 무른 게 분명하지 뭐에요. 의붓동생을 떠안고 살게 된 것도 모자라 아버지까지 불쑥불쑥 드나들며 마치 식당이라도 되는 양 청국장 끓여 내라 뭐해내라 어이없는 요구를 하는데도 불편한 내색 하나 못하고 결국엔 아버지 원대로 밥상을 다 차려내더라고요.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면 족하지 않을까요
봉선 씨, 앞으로도 ‘핑크치킨’으로 위안 받아도 괜찮아요
아마 첫 회였을 거예요. 갖가지 나물 반찬을 늘어놓고 혼자 밥 먹는 장면을 보며 그 또한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카레나 볶음밥이라면 또 모를까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상차림이 쉬운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모든 게 다 초등학교 적부터 아버지 밥 차려드리느라 이력이 난 솜씨더군요. 시금치 무쳐내고 바글바글 찌개 끓여서 갖은 밑반찬과 함께 아버지 저녁상을 차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 마음이 다 짠했습니다. 허나 아버지는 어이없게도 딸이 비위에 거슬리는 소리 한 마디 했다고 그 밥상을 단숨에 쓸어버리시데요. 혼자 살아보려고 애쓰는 딸이 애처로워 눈물이 나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왜 이번에도 진급 심사에서 탈락했느냐며 염장이나 지르시기까지 했죠. 아무리 울화가 치미신다 한들 설마 본인만큼 속이 쓰리고 아프겠습니까. 오죽하면 1인 시위에 나섰겠어요. 게다가 그 와중에 철딱서니 없기로는 딸하고 쌍벽을 이룰 달이 엄마는 자기 딸 밥 좀 챙겨주라며 전화도 하대요. 뻔뻔해도 유분수지 웬 불난 집에 부채질인지 원. 그나저나 도대체 봉선 씨 밥걱정 해줄 사람은 어디 있는 거냐고요.

그처럼 마음 붙일 곳 한 구석 없는 처지이다 보니 아무리 덧없는 상상일지언정 위로가 아니 될 수가 있나요. 달콤한 트라이앵글 연주의 모닝콜이나 상냥한 목소리로 불러주는 ‘You are so beautiful’에 넋을 놓는다 해도 그게 무에 그리 흉이 될 일이겠습니까. 생각해보면 누구보다 당찼던 SBS 의 길라임(하지원)도 립싱크 가수 오스카(윤상현) 앞에만 서면 무장해제 상태가 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발끝으로 톡톡 바닥을 두드리고 있던 라임 씨가 눈에 선하네요. 물론 환상은 이내 벗겨지고 “예쁘대요. 내가 아름답대요. 나 때문에 기쁘고 행복하고, 깜깜한 게 벗겨지는 등불 같대요. 누가 날 그렇게 생각해주겠어요. 하늘이 준 선물이라니, 누가 날 그렇게 불러주겠어요. 거짓말인데 난 아무 것도 아닌데”라며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그로 인해 봉선 씨가 잠시잠깐이라도 위안을 얻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싶어요. ‘핑크치킨’, 부디 봉선 씨가 맘 붙일 곳을 찾는 날까지 자주자주 선물 역할을 해주길 부탁합니다.

봉선 씨, 앞으로도 ‘핑크치킨’으로 위안 받아도 괜찮아요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장경진 th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