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라디오] 에반에센스, 코스프레를 벗어 던진 마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모두가 이스트팩을 매고 있을 때 서울에서 유행하는 라이프가드 가방을 매고 와 마치 자신만의 독특한 센스인양 구리시 패션 리더로 군림하는 재수 없는 친구를 보는 것 같은. 미국에서만 8백만 장, 전 세계에서 1500만 장을 팔았다는 외형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에반에센스의 데뷔 앨범 < Fallen >은 북유럽에서 유행하던 고딕 메탈의 ‘에센스’만을 빼와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버무렸다는 혐의를 피하긴 어려웠죠. 물론 모든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다만 그걸 자신의 센스인양 포장하는 건 다른 문제지요. 씨어터 오브 트래저디의 셀프타이틀 데뷔 앨범에서 유려하게 흐르던 중세적 비장미를 기억하는 일부 익스트림 메탈 팬들에게 ‘Going Under’ 혹은 ‘Call Me When You`re Sober’ 뮤직비디오에서 마녀 같은 느낌을 연출하는 에이미의 모습이 그저 코스프레처럼 비춰진 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래서입니다. 5년 만의 귀환이라는 음반사의 호들갑스러운 홍보에도 불구하고 에반에센스 3집이자 셀프타이틀 앨범인 < EVANESCENCE >의 발매에 심드렁했던 건. 사실 이번 앨범이, 타이틀곡 ‘What You Want’가 혁신적인 무언가를 보여주는 건 결코 아닙니다. 에이미의 보컬은 여전히 나쁘지 않은 정도의 수준이고, 두 명의 기타리스트가 귀를 홀릴 리프를 만드는 건 아닙니다. 다만 육중한 질감의 드럼이 큰 울림을 주는 ‘What You Want’의 인트로와 어쿠스틱 피아노 사운드를 최대한 배제한 구성은 오히려 전통적인 메탈로의 회귀를 연상케 합니다. 뮤직비디오의 에이미 역시 과거처럼 연출된 드라마 타이즈보다는 관객과 호응하며 방방 뛰는 록킹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요. 다시 말하지만 혁신적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동네에 흔치 않은 메이커 하나로 잘난 척 하던 재수 없던 친구는 이제 특별한 과시 없이 자신에게 깔끔하게 어울리는 옷을 매치할 줄 아는 친구가 되어 돌아온 것 같습니다. 성숙이란, 아마 이런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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