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욱 감독님, 유선 씨 마음 좀 헤아려주세요

김병욱 감독님, 유선 씨 마음 좀 헤아려주세요
김병욱 감독님, 유선 씨 마음 좀 헤아려주세요
“엄마, 잘 있어요. 내 뒤엔 이제 아무도 없어요. 안녕. 엄마” 얼마 전 꿈결에 MBC (이하 )의 유선 씨가 떠나보내야 했던 마지막 난자의 목소리가 아직도 제 귓가에 맴돕니다. 잠든 유선 씨의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도 잊히지 않아요. 조기 폐경. 별 일 없이 맞닥뜨렸다면 심드렁하니,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사기와 부도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지 싶으니까, 그래서 더 속이 상한 거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예전 집 아일랜드 식탁 위에서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던, 마냥 구김살 없던 첫 회 적의 유선 씨를 자꾸 떠올려 보게 되네요. 지금도 늘 부엌에서 목격되는 유선 씨지만 그때와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라서 말이죠. 그 시절, 아마 남들에게 부럽단 소리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유선 씨만큼 서글픈 사람이 있을까요?
김병욱 감독님, 유선 씨 마음 좀 헤아려주세요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한 액수가 무려 30억이라니 남편 안내상 씨의 사업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고 남거든요. 누구나 꿈에 그리는 마당이 있는 집이며 척척 돈 잘 벌어다 주는 남편, 그리고 누굴 닮았는지 남달리 출중한 외모의 아이들. 아들은 아이스하키 선수에다 딸은 미국 유학 중이었으니 여느 엄마들처럼 애들 성적에 목을 맬 이유도 없었겠죠. 보아하니 맘고생 시키는 시집 식구들도 아니 계셨던 것 같고, 친정 쪽으로도 신경 쓸 거리가 없는 한 마디로 늘어진 팔자였던 거예요. 물론 남편의 개떡 같은 성격이야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겠지만 요즘처럼 집에 붙박이로 계시지는 않았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던 것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거잖아요. 피부관리 숍에서 마사지를 받다 말고 빚쟁이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집에 두고 온 패물이며 가방, 구두들, 하나 둘씩 사 모았을 그릇들은 또 어쩔 거예요. 자려고 누웠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날 일이죠.

전에는 이런저런 모임도 꽤 잦으셨을 텐데 이젠 두문불출 갇혀 계셔야 합니다. 그나마 코에 바람을 쐬어 준다는 게 친구 가게를 도우러 나서는 건데 그건 또 뭐 그리 마음 편한 외출이겠어요. 게다가 잠시 잠깐을 가만히 못 두는 안내상 씨죠. 밖에서 시간이라도 좀 보낼라치면 득달같이 불러대는 남편, 그것도 매번 밥 차려내라는 호출인지라 그때마다 속이 뒤집어지지 싶어요. 무엇보다 별 생각 없이 편히 살던 예전에는 인지하지 못했을, 남편이 도무지 존경할 구석이 없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유선 씨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잃은 그 모든 것들이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편을 통해 얻은 것들이었다는 점 또한 서글프겠죠. 친정 동생들에게 얹혀 지내면서도 새로운 삶을 살아볼, 개척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겠어요.

그러나 여전히 운명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김병욱 감독님, 유선 씨 마음 좀 헤아려주세요
그처럼 바싹 말라버린 겨울나무가지 같은 삶 속에 어느 날 불현 듯 한 줄기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던 겁니다.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누구와도 대화다운 대화를 해보지 못하는 나날이었잖아요. 돈 달라, 밥 달라는 소리나 줄곧 들으며 지내다 눈 맞추고 웃어주며 차 한 잔 함께 하자는 한 남자(정재형)를 만났다는 건, 유선 씨 말대로 사막 한 가운데서 어린왕자를 만난 느낌이었을 거예요. 문득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전 이런 날 좋아요. 그냥 일상적이지 않고 무언가 일렁이는 것 같아서요”라고 말하는 남자가 어디 흔할 라고요. 그러나 에디뜨 삐아프를 함께 듣자는 그의 달콤한 제안을 남편의 귀가 재촉 때문에 뿌리쳐야 했고 결국 그가 손에 쥐어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도 바람에 날려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내라는 자리가, 어머니라는 자리가 유선 씨의 마음을 붙들어 맸던 거겠죠.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가슴 한편에 오래도록 간직하며 살 생각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운명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그 남자가 유선 씨네 집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들이닥치는 떼먹은 돈 받아주는 조직의 일원이었다니요. 기절을 할만도 하지요.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면 끝이 없이 꼬여만 간다는 것도, 삶은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일 뿐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나이이긴 해도, 그래도 한 줄기 바람 같은 유선 씨의 꿈마저 잔인하게 짓밟아버렸다는 사실이 너무나 야속하네요. 뭐 그래도 그럭저럭 또 살아가긴 하겠지만 대체 제작진은 왜 이리 유선 씨를 홀대하는 걸까요? 오늘 보니 SBS 의 지형(김래원)네 집 이모나 향기(정유미)네 집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도 유선 씨보다 대사 분량이 많겠더라고요. 제작진 여러분, 유선 씨 마음 좀 헤아려주실 수는 없나요?

김병욱 감독님, 유선 씨 마음 좀 헤아려주세요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