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의 오빠들│어떻게 ‘팬질’이 변하니

아이돌에 미치면 고생한다. 하지만, 세상 참 좋아졌다. 어쩐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개의 명제는 현재진행형이다. 과거 소속사의 공지나 일부 매체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던 스타들의 소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팬 카페와 팬 사이트, 미니홈피 등 변화하는 플랫폼에 맞추어 확산되었고 연예기획사들은 이러한 정보를 UFO 문자나 카카오톡 등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과 접목시키며 또 다른 시장을 만들어냈다. 90년대, 좀처럼 범접할 수 없이 높은 곳에 있던 스타들이 2011년 현재 트위터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SNS로 팬과 대중 가까이 다가와 소통하는 흐름은 기술의 발전에 따른 흥미로운 움직임이다. 에서는 2008년 “괜찮아, 누나가 이번 달에 인센티브도 받았어”와 2010년 “괜찮아, 누나가 아이디 50개 만들어 놨어”의 주인공이자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이돌 팬으로서 격동의 세월을 온 몸으로 관통해 온 김수연 씨를 통해 그 격세지감을 느껴 보기로 했다.

90년대의 오빠들│어떻게 ‘팬질’이 변하니
뚜르르르- 뚜르르르- 통화연결음이 울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4층 교실에서 공중전화가 있는 1층까지 뛰어내려와 아슬아슬하게 첫 타자로 수화기를 낚아챘지만 쉬는 시간 10분 중 1분이 넘는 시간이 이미 지난 채였다. 마음이 급해진 김수연 씨(18세. 가명)는 무심히 돌아가는 현관 앞 괘종시계의 초침을 노려보았다. “본 정보는 30초당 100원의 정보이용료와 부가세가 별도로 부가됩니다” …걸렸다! 치마 주머니 속 백 원짜리 동전들을 헤아리며 김수연 씨는 방금 끝난 화학 수업 때보다 100배는 높은 집중력을 발휘해 사서함 언니의 낭랑한 음성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11월 8일 화요일, 태평천하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1818 사서함입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먼저, 우리 태평천하는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지내나 많이들 궁금해 하고 계실 텐데요. 오빠들은 요즘 숙소와 연습실 외에는 전혀 가는 곳이 없을 만큼 앨범 작업에 열심이라고 하구요. 특히 안무를 맡고 있는 태풍 오빠와 록키 오빠는 잠 잘 시간까지 쪼개서 우리에게 멋진 무대를 보여주려고 노력 중이랍니다.” 꺄아, 도리깨질 춤과 물레방아 춤의 뒤를 이을 태풍 오빠의 새로운 안무라니!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식이었다. 역시 사서함 언니는 우리 마음을 잘 안다니까! “그래서, 우리 팬들 모두 아시겠지만 얼마 전 에 나온… L양이라는 분과의 루머는 당연히 근거가 없는 허위사실이구요. 걱정하시는 우리 팬들의 마음을 담아 소속사에서도 썸데이 측에 강력히 항의를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빠들 말만 믿고 가도록 해요.” 훗, 그럼 그렇지. 태평천하 공식 팬클럽, 자랑스런 태평성대 소속인 김수연 씨는 애초에 그런 루머 따위에 동요를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언론으로서 역할을 잊은 의 무책임한 보도를 비판했을 뿐이다.

“다음은 이번 주 스케줄 몇 가지를 말씀드릴게요.” 그러나 이어지는 멘트에 김수연 씨의 오감이 깨어나고 손이 바빠졌다. “수요일 열두 시 양재동 음식백화점 오픈식, 여섯 시 씨나락 레코드 강남점 싸인회, 여덟 시 쇼탱 스페셜 무대 생방, 목요일 두 시 순천 벼아가씨 선발대회, 일곱 시 망상 대학교 축제가 있으니까 많은 분들 가셔서 응원 부탁드려요.” 헉헉, 국사 선생님보다 빠른 말투로 읊어대는 스케줄 가운데 하나라도 놓치면 다시듣기를 눌러야 하는데 그러기엔 이미 뒤에 줄 선 아이들의 짜증으로 등이 따끔거리던 차였다. “끝으로 기쁜 소식 하나가 있어요. 이번 주 목요일, 11월 10일이 수학능력시험 날이잖아요? 태평천하 오빠들이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수험생들을 위해 특별 이벤트를 준비 중이라고 하네요. 그게 뭔지는 내일 사서함에서 다시 알려드릴게요. 수능 준비하시는 우리 태평성대 여러분, 파이팅!” …뭐, 수능? 수~능? 이게 아닌데, 뭔가 이상한데… 김수연 씨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떨려왔다. 언니 양반, 수능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요!

90년대의 오빠들│어떻게 ‘팬질’이 변하니
“여섯 시 반에는 일어나야 한다며, 일곱 시 다 됐다!” 김수연 씨를 충격과 공포의 늪에서 구원해준 것은 엄마의 퉁명스런 목소리였다. 아…재입대 꿈 다음으로 무섭다는 수능 다시보기 꿈이었구나. 김수연(31세) 씨의 하루가 또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그 땐 사서함 관리자 언니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버스를 타고 출근하며 김수연 씨는 생각했다. 오빠들의 소식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고 듣고 전해주는 부럽고도 위대한 존재, 전지전능 사서함 언니의 목소리에 넋을 놓거나 때때로 오빠들이 직접 컴백 메시지라도 남겨주는 날엔 몇 번이고 다시듣기를 눌러 대다가 전화비가 두 배로 나오는 통에 엄마한테 등짝을 맞고 쫓겨나던 날 김수연 씨는 언젠가 꼭 사서함 언니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더랬다. 물론 그 꿈은 공개방송에서 자리배치를 담당하는 공식 팬클럽 임원으로, 어딘가 굉장히 ‘있어’ 보이던 PC 통신 팬클럽 운영진으로, 은근한 권력과 위엄을 자랑하던 공식 팬 카페 게시판지기로, 수능시험보다 어렵고 논술시험보다 장황한 회원가입 신청서를 제출시키던 팬 사이트 주인장으로 계속 바뀌어가긴 했지만.

특히 김수연 씨가 3년 전 좋아했던 그룹 레전드의 광명이가 그 존재를 알고 직접 와서 인증 글까지 남겼던 팬 사이트 ‘온누리에 광명’에 들어가기 위해 2박 3일 동안 작성했던 가입신청서는 지금 생각해도 졸업 논문보다 공들인 명문장으로 가득했다. 또, 당시 김수연 씨가 54전 55기의 정신으로 광명이로부터 받아낸 UFO 문자 [누나 퇴근 잘 해요^^]는 팬 카페 ‘UFO 자랑 게시판’에서 무려 74개에 달하는 부러움의 댓글을 받았을 만큼 짜릿한 경험이었다. 공개방송에 가면 무대 위에서 면봉만한 크기로 움직이는 광명이가, 얼굴도 모르는 평범한 누나 팬에게 직접 답장을 보내주다니, 물어물어 숙소 앞을 찾아갔다가 태평천하의 머리털 하나 못 보고 쓸쓸히 돌아오던 과거에 비하면 그야말로 꿈만 같은 일이었다. 비록 그 날 이후 UFO 문자 보내기에 중독된 김수연 씨가 건당 300원짜리 문자를 하루 수십 통씩 보내다가 하필 집으로 날아온 휴대폰 요금 고지서를 엄마에게 들켜 십 년 만에 또다시 등짝을 맞고 “으이그, 이 정신 빠진 기집애야!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고 시집이나 가! 그 어린 것들 말고, 옆집 은정이처럼 라도 나가서 남자를 찾던가!” 라며 쫓겨날 뻔 했던 기억은 악몽 같았지만. ‘역시 고지서는 무조건 이메일이야.’ 김수연 씨는 문득 느껴지는 한기에 잠시 몸을 떨었다.

90년대의 오빠들│어떻게 ‘팬질’이 변하니
그러고 보면 트위터란 참으로 좋은 것이었다. 작년부터 청춘스타 강기린을 좋아하게 된 김수연 씨였지만 그가 미니홈피로 근황을 전하던 시절에는 다이어리에 다른 팬들이 빼곡히 붙여 놓은 스티커를 일일이 치우고 글을 읽느라 눈이 빠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바쁘게 마우스를 움직여댄 뒤 드러난 글이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겠어.” 단 한 줄이었을 때의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심란함, 그리고 스티커 ‘모두 숨기기’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허무함이란. 무엇보다 강기린이 언제 새로운 글과 사진을 올릴지 몰라 틈날 때마다 미니홈피를 체크해야 한다는 것이 번거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강기린이 트위터를 시작한 뒤로는 그를 팔로우하기만 하면 실시간으로 그의 근황과 생각들을 읽을 수 있는 놀라운 세계가 펼쳐졌다. 비록 김수연 씨는 강기린의 8만 9천 3백 2십 5명 팔로워 가운데 한 명일 뿐이지만 그가 올린 글마다 답 멘션을 달고 리트윗을 하는 데는 제한이 없었다. 심지어 돈도 들지 않고, 엄마도 출동하지 않으니 기술의 발달이란 아름다운 것이었다. 게다가 강기린은 가끔 기분이 좋을 때 ‘기린타임’이란 이름으로 팬들의 트윗에 모두 답장을 해 주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는데, 지난 두 번의 기린타임을 미팅과 회식으로 놓친 김수연 씨는 오매불망 다음 번 기린타임을 기다리며 트위터 화면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크흠…” 가끔 등 뒤에서 다가오는 부장님의 감시 레이더를 피할 수 없다는 것만이 문제일 뿐. 김수연 씨가 황급히 창을 끄고 계약서 문서창에 집중하려는 순간, 휴대폰이 드르륵 울렸다. 스마트폰 용 1대 1 채팅 프로그램, 코코아톡 알림이었다. 김수연 씨가 여전히 아끼는 아이돌 상투스의 소속사는 최근 코코아톡과 제휴를 맺은 뒤 종종 코코아톡을 통해 상투스의 미공개 사진이나 근황을 전해주곤 했다. 마침 아이들이 루마니아에 공연하러 가 있어서 소식이 궁금했던 김수연 씨가 후방을 경계하며 슬쩍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오직 상투스 톡친만을 위한 견훤의 사진선물입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채팅창에 견훤의 뽀얀 민낯 셀카가 떴다. 김수연 씨가 저도 모르게 활짝 이모미소를 지었다.

글. 최지은 five@
일러스트. 그루브모기
편집. 이지혜 se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