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명희 작가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며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프로포즈로 시작해서 결혼으로 끝났다. 출생의 비밀도, 부모의 원수도, 알고 보니 여고 동창인 사돈지간도 없는 세상의 흔한 결혼 이야기. 그러나 JTBC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이하 <우결수>)는 누구나 다 안다고 여겼던, 더 이상 새로울 것 없어 보였던 ‘결혼’ 이야기로부터 개인의 성장과 관계에 대한 성찰, 불합리한 관습에서 벗어나는 용기까지 제시하며 실속 있는 20부작의 막을 내렸다. 서로의 욕망 때문에 부딪히지만 누구도 절대적으로 나쁘거나 착하지 않은 캐릭터들, 리드미컬하면서도 말맛이 살아 있는 대사로 2012년 우리 사회의 단면을 성공적으로 담아낸 하명희 작가를 <텐아시아>가 만났다.

 

Q. <우결수>는 방영 전 KBS <부부 클리닉 – 사랑과 전쟁>(이하 <사랑과 전쟁>) 작가가 쓰는 결혼 이야기라는 면에서 관심을 모았다. 미니시리즈 데뷔가 늦은 편이기도 해서 그동안 어떤 작업들을 했는지 궁금했다.
하명희: 어릴 때부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어떤 글을 쓰게 될지는 몰랐다. 대학 졸업 후 1년 정도 직장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소설을 배우기도 했고 방송 아카데미 드라마 반에 다니기도 했는데, 어느 날 드라마 세트장에 견학 갔다가 운명 같은 기운을 느꼈다. (웃음) 그 후 작가교육원에 등록했고, 94년 MBC <베스트 극장> 극본 공모전에 당선됐다. 최완규 작가의 뒤를 이어 <종합병원>을 6개월 정도 썼고, KBS에서 <사랑이 꽃피는 계절>이라는 청소년 드라마와 단막극을 몇 편 쓴 뒤에는 한참 쉬었다. 그리고 2006년부터 <사랑과 전쟁>에 참여해서 2009년에 시즌 1이 막을 내릴 때까지 썼다.

 

Q. <사랑과 전쟁> 집필은 앞서 자신의 작품을 썼을 때와 전혀 다른 경험이었을 텐데.
하명희: <사랑과 전쟁>에 들어간 건 작가 인생에서 ‘신의 한 수’였다. (웃음) 신인 때 내가 썼던 글을 보면 감독들이 ‘소녀 취향’이라고 했다. 잔잔하고 선이 곱고 캐릭터가 약하다며.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런 말을 듣지 않는 걸 보면 ‘막장’의 세계에서 많이 배운 것 같다. 나는 인생에 특별한 우여곡절이 없이 평범하게 살아 온 사람인데, <사랑과 전쟁>의 아이템이 되는 사례들을 보면 ‘왜 이 사람들은 이혼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진짜 많이 들었다. 누가 봐도 이혼이 답인 상황인데 하지 않는 사람들, 힘들고 괴로워도 살아내야 하는 삶에 대해 성찰도 공부도 많이 했다.

“<우결수>의 극성은 철저하게 보편성에서 시작했다”

Q. <사랑과 전쟁>을 통해 결혼이라는 소재에 대한 노하우를 얻었겠지만 <우결수>처럼 극단적인 설정이나 독특한 장치 없는 평범한 결혼 이야기를 미니 시리즈로 만드는 데는 어려움도 따랐을 것 같다.
하명희: 나는 드라마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일상성이라고 생각한다. 감독들에게 ‘극성(劇性)’이 없다는 지적을 많이 받긴 했지만 일단 내가 봐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결수>의 극성은 철저하게 보편성에서 시작했다. 결혼은 하든 안 하든 살면서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니까, 그 이야기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싶었다. 그리고 혜윤(정소민)의 결혼과 동시에 언니 혜진(정애연)의 이혼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극성을 강화하기로 했다.

 

Q. 그런데 <우결수>의 중심은 결혼이나 이혼 당사자들이 아니라 자매의 어머니인 이들자였던 것 같다. 억척스럽거나 자식에게 희생적인 어머니상은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지만 이미숙을 통해 생명력을 얻은 이들자는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강렬한 캐릭터였는데.
하명희: 들자는 거칠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저돌적이고 적극적인 어머니로 설정했는데, 이미숙 씨가 캐스팅된 걸 알고 조금 고심했다. 그렇게 여성적인 매력이 있는 배우에게서 억척 엄마의 모습이 잘 드러날까 걱정했던 거다. 그런데 역시 보통 배우가 아니었다. 나는 대본을 쓸 때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도록 감정 지문을 주지 않는 편인데 이미숙 씨가 “남편 없이 자식 결혼 시키는 엄마 마음을 네가 아냐?”라는 대사의 감정을 너무나 잘 살리는 걸 보며 정말 감탄했다. 악착같이 생계를 꾸리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당당한 들자를 그려내신 거다. 화제가 됐던 파란 아이섀도도 직접 설정해 오셨는데, 처음에 몇몇 사람들은 요즘 누가 그런 화장을 하냐고 했지만 나는 들자라면 그럴 만 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남들이 뭐라던 지울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이 파란 아이섀도는 김태희가 해도 안 어울리는데 제가 해서 어울리는 거예요” 라는 대사를 넣었다. 그리고 들자의 “사람들 다 나더러 이미숙 닮았다고 그래!”는 애드리브였다. (웃음)

 

Q. 결혼 준비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면 대개 결혼을 반대하는 상대방 부모와의 갈등을 떠올리지만 그보다 더 치열한 싸움은 자기 부모와의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데 집중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하명희: 저쪽은 어쨌든 남이니까 갈등을 붙이기 힘들다. 그리고 결혼 전이니까 갈등이 커질 경우 찢어지면 그만이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관계는 헤어질 수 없으니까 훨씬 치열할 수밖에 없다. 지금 세대와 부모 세대는 가치관 자체가 다르니까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다.

 

Q. 생활 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양가 부모의 갈등 역시 상견례, 예단, 혼수 준비 등 단계마다 치밀하게 그려졌다. 그 미묘한 과정을 어떻게 구축했나.
하명희: 보편성을 갖는 이야기인 동시에 정보를 전달하자는 의미도 있었다. 사실 결혼하는 사람들도 눈앞에 닥칠 때까지 준비 과정을 잘 모른다. 그래서 기본적인 순서를 취재했고, <사랑과 전쟁> 때 예단과 혼수에 얽힌 이야기를 쓰면서 알게 된 내용도 참고했다. 사실 나는 우리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 중 결혼을 한 적도, 결혼을 결심한 적도, 아이를 낳은 적도 없고, 딱 하나 사랑만 해 봤다. (웃음) 중요한 건 관찰력과 상상력이다. 전혀 다른 문화의 충돌, 남자 집에 전혀 돈을 지불할 생각이 없는 들자와 아들 가진 엄마 은경(선우은숙)이 만난다면 어떻게 부딪힐 것인가.

 

Q. 드라마에서 금기시되어 오던 연인들의 스킨십과 혼전 관계를 일상의 일부로 그려낸 시도 역시 과감했다. 어떤 의도였나.
하명희: 처음부터 “사랑과 섹스가 난무하는 드라마를 쓸 거야!”라고 했다. 대본을 보신 제작사 대표님께서는 “그런 얘기가 어딨어요?”라고 하셨지만. (웃음) <사랑과 전쟁>을 쓰면서 섹스리스 부부에 대한 사례를 많이 봤는데, 나는 가족 내에서 서로 스킨십이 많으면 사회적 문제도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부모와 자녀가 키스신 정도는 같이 볼 수 있어야 하고, 정상적인 관계에서의 스킨십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드라마 속 로맨스가 굉장히 점잖게 그려지는 것과 달리, 자신의 유치함을 드러내고 그걸 받아줄 수 있는 상대와의 관계가 건강한 연애인 것 같다.

“똑똑한 여주인공이 민폐 끼치며 감정이입 시키는 것도 싫었다”

 

Q. 혜윤이라는 캐릭터도 흥미롭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내하기보다는 자기 욕망이 뚜렷하고 현실 감각도 있으면서 때로는 이기적이거나 계산적인 모습도 보인다는 면에서 ‘사랑스런 여주인공’의 전형에서 벗어났다.
하명희: 그게 결점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적인 성격은 매력으로 넣었다. 너무 착하고 완벽한 캐릭터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평소에는 똑똑한 여주인공에게 일부러 멍청한 지점을 넣어서 민폐 끼치게 하며 감정이입 시키는 것도 싫었다. 그보다 내가 혜윤의 결점으로 넣은 건, 보통 때는 멀쩡한데 연애할 때만 괜히 남자를 괴롭히고 달달 볶고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 평범한 여자아이들 중에도 종종 있는 성격인데, 혜윤은 콤플렉스로 인해 갖고 있던 그 결점을 성장하면서 버리게 되는 거다.

 

Q. 혜윤이 “우리 모두 사춘기만 돼도 부모에게 객관적 판단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성장하면서 부모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결혼이 특히 그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쉽지 않은 과정인데, 이를 그리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하명희: <우결수>에서 연인, 부모와 자식, 부부, 형제자매, 동성친구, 이성친구 등 다양한 관계를 총정리 했다. 결혼은 겉으로 드러난 것 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 대한 정리와 새 출발이기도 하다. 특히 나이가 들면 자식이 부모를 떠나야 하는 것처럼 부모도 자식을 떠나야 한다. 사실 부모만 모르지, 자식은 밖에서 내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다 씹고 다닌다. (웃음) 부모는 항상 자식에게 내가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나를 비판적으로 생각할 리 없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걸 얘기해주고 싶었다.

 

Q. 대부분의 캐릭터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악역도 선역도 없이 각자의 입장이 설득력 있게 드러났는데, 정훈(성준)의 아버지 동건(강석우)은 능력과 인품 면에서 거의 완벽한 인물이었다. 이런 판타지를 제시한 이유는 뭔가.
하명희: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일과 술 때문에 가정으로부터 멀어졌다가 나이 들면 가족과 더 소원해지는 경우가 많았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친구들은 사회생활이나 연애 문제에서도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훈이 아버지 같은 남자가 있으면 가정이란 게 얼마나 균형 있고 건강해질 수 있는가를 그려보고 싶었다. 정훈이가 돈을 많이 버는 남자는 아니지만 결혼하고 싶은 남자, 함께 가는 삶을 꿈꿀 수 있는 남자가 된 것도 이런 아버지의 영향이니까 드라마를 보는 누군가도 그런 남편,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좋겠다.

 

Q. 대사가 빠르고 많은 편인데 각 캐릭터에 맞는 표현과 리듬, 대사 자체가 갖는 힘이 느껴졌다. 집필할 때의 원칙이 있다면.
하명희: 첫째는 ‘말’을 쓰자.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말. 둘째는 약간 생각할만한, 극에서만 볼 수 있는 대사를 섞자. 둘의 적절한 배합은 9:1 정도로 하려고 한다. 들자의 대사 같은 경우는 이미숙 씨를 생각하면 절로 떠오른 것도 많다. 영감을 주는 배우다.

 

Q. <우결수>는 극본, 배우, 연출의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졌다는 면에서 근래 드문 작품이기도 했다. 김윤철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하명희: 원래 팬으로 좋아했던 감독님이라 이 작품을 하고 싶다고 오셨을 때 정말 기뻤다. 이야기의 구조와 대본의 특성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계신 분이다. 대사가 많은 것에 대해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주셨고, 들자와 사돈 은경(선우은숙)의 기 싸움 신 같은 데서는 오히려 더 대사를 늘려달라는 제안도 하셨다. 주 2회 촬영, 편집, 음악까지 워낙 꼼꼼하게 챙기시느라 체력적으로 정말 힘드셨을 텐데도 제작 과정에서 나를 제일 편하게 해 주신 분이다.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

Q. 돌이켜 보면 <우결수>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나.
하명희: 결혼할 때 남자는 여자를 책임지겠다고 하는데 왜 여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 의문에서 출발해 많은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여자들에게 남자 잘 만나면 팔자 피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판타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세상은 그렇지 않게 바뀌어 있는데 드라마는 시청자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현실의 남자 중에는 매달 2백만 원 이하를 버는 월급쟁이들이 70%고, 그들과 결혼해서 생활을 해야 하는 여자들 역시 드라마처럼 살 수 없고 밖에 나가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런 현실을 미리 생각해보면서 내가 이 남자와 어떻게 생계를 꾸리고 어떤 방식으로 함께 살아갈지에 대해 주체성을 갖고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Q. 그렇다면 이 작품이 시청자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길 기대하나.
하명희: 세상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도 용서하고 다른 사람들도 용서하며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서로의 관계를 통해 구원받되 서로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 내가 지금 착하게 살고 있는 방식이 맞다고 믿으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인간관계에서 동비(한그루)같은 ‘호구’들이 많은데, 어떤 이유든 그들이 남에게 잘 해주고 배려해주는 건 좋은 거라 생각한다. 사랑도 주는 사람이 강자인 것처럼.

 

Q. 다음에는 어떤 작품으로 만날 수 있을까.
하명희: 2010년 방송콘텐츠 진흥재단 공모전에서 당선된 의학 드라마 <여깡패 혜정>을 준비하고 있다. 청소년기를 암울하게 보냈던 여자 깡패가 과거를 딛고 의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데 대본이 중반 정도까지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하고 싶다. 우리나라 의료 체계의 변화에 대한 얘기도 다루고 있어서 사회적인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Q. 궁극적으로 어떤 작가가 되기를 꿈꾸나.
하명희: ‘Wounded healer’ 즉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상처 입을 수밖에 없지만 작가는 그런 상처를 입으면서도 타인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