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웅│내 인생의 보물 같은 영화들

영화 <분노의 윤리학>에는 한 여대생의 죽음을 둘러싼 5명의 악인이 나온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중 가장 악질을 판단하진 않는다. 오히려 분노라는 감정 앞에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보여주며 그들 모두에게 어처구니없다가도 애처로운 느낌을 갖게 한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현수(김태훈), 남에게 피해는 안 준다며 여자를 도청하는 정훈(이제훈), 빌려준 돈을 뜯어내는 명록(조진웅), 고상한 척하는 교수 수택(곽도원)과 남편의 불륜 사실에 여대생 죽음 따윈 개의치 않는 선화(문소리)까지 이들은 모두 올바르지 않지만 한순간에 나약하고 비굴해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채업자 명록은 배우 조진웅을 만나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탄생됐다. 돈을 받기 위해선 폭력도 불사하지만 목표만 달성하고 나면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를 차리고 비위를 맞추는 명록의 처세술은 잔인하기보다 능청스러워 웃음을 유발한다. KBS <솔약국집 아들들>, <추노>의 곽한섬 등으로 풍채와 달리 친근함을 보여줬던 조진웅이 MBC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의 거친 장호, 영화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의 김판호 등 무자비한 캐릭터를 맡아도 인간적인 매력을 전해줬던 것처럼 말이다.

 

조진웅의 그 힘은 어떤 캐릭터든 허투루 대하지 않는 진심에서 시작된다. 그는 명록도 올바르진 않지만 결국 돈에 끌려 다니며 살아야 하는 불쌍한 인간으로 읽었다. “사실 명록이 나쁘고 잔인한데 돈만 보고 살잖아요. 그 인생은 얼마나 처절하겠어요. 분노를 표출하지만 결국 명록이도 놀아나고 있는 게 안타까웠어요.” 그리고 진지하게 캐릭터에 접근한 그의 태도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명록을 연기하면서 저도 분노할 일을 참으며 살고 있단 생각을 했어요. 그게 화가 나는데 어쩔 수 없는 나를 보면 슬퍼지는 거예요. 배우인 저뿐 아니라 돈이나 직장에 매여 살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도 그런 감정을 느낄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제가 이해할 수 없어 미워했던 사람들에게도 연민을 느껴요. 다 이해되고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매번 고민하고, 진심을 다해 다양한 인물을 살아내는 조진웅. 그는 십여 년 동안 쉬지 않고 이렇게 노력한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의 삶과 고충을 담아낼 수 있는, 더 넓은 배우가 되고 있다. 이 점이야 바로 그의 모든 연기에 따뜻한 감성이 묻어나는 이유일 것이다. 배우 조진웅이 “엄마, 아빠 중 누가 더 좋은지 묻는 것처럼 잔인하다”며 정성스레 고르고 고른 인생의 보물 같은 영화 또한 그만큼 진심이 어려 있었다.

1. <28일 후> (28 Days Later…)

2003년 | 대니 보일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영화를 존경해요. 그래서 정말 5편만 고르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래도 그 중에서 <28일 후>는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좀비들이 스멀스멀 걸어 다니는 게 아니라 뛰기 시작했잖아요. 좀비 영화의 혁명인 거 같아요.”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런던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짐(킬리언 머피)은 어느 날 깨어나지만 런던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들이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침팬지들의 공격을 받고 감염된 지 28일 만의 일이었다. 짐은 어렵사리 생존자 셀레나(나오미 해리스)와 마크(노아 헌틀리)를 만나 위기를 모면하지만 바이러스는 전 세계에 퍼졌고 짐은 가족을 찾는 힘겨운 여정을 계속하게 된다.

2. <레옹> (Leon)

1995년 | 뤽 베송

“<대부>를 고를까, 이 영화를 고를까 계속 고민했어요. 그러다 강렬했던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레옹>을 고르게 됐습니다. 한 자리에서 이 영화를 계속 본 것 같아요. 움직이지도 않고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8번을 내리 봤어요. 그 정도로 절 빨려 들어가게 했던 영화에요.”

 

청부살인을 하며 혼자 사는 레옹(장 르노)은 마약 중개인 아버지 때문에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파트 이웃 마틸다(나탈리 포트만)를 만난다. 마틸다의 가족 모두가 범죄에 휘말려 죽지만 마틸다는 레옹 덕분에 살게 된다. 그 후 마틸다는 동생의 복수를 위해 레옹에게 살인 청부를 배우게 되고 둘은 가족 못지않게 우정을 쌓아간다.

3. <세상 밖으로> (Out To The World)

1994년 | 여균동

“이 영화를 처음 본 게 고등학생 때였어요. 질풍노도의 시기였죠. 처음으로 영화를 보면서 고민 같은 걸 하기 시작했어요. 진짜 세상 밖으로 나가게 해준 영화죠. 실제로 나가기도 했고 결국 이 자리로 돌아오게 한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문성근, 이경영, 심혜진 등이 주연한 <세상 밖으로>는 의도와 다르게 순간 저지른 실수 때문에 사람이 죽어 복역 중인 성근(문성근)과 좀도둑 경영(이경영)이 우연치 않게 탈옥을 하게 되며 벌어진 이야기를 담았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불행한 인생을 살아온 혜진(심혜진)과 함께 고속도로와 황톳길을 걸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한편 여균동 감독은 이 작품으로 제33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4. <나의 사랑 나의 신부> (My Love, My Bride)

1990년 | 이명세

“돌아가셨지만 고(故) 최진실 선배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저에겐 막연한 하이틴 스타셨죠. 그냥 이유 없이 좋은 거 있잖아요. 선배님 얼굴 나온 책받침도 갖고 있을 정도로 너무 좋아해서 이 영화는 저에게 첫사랑과 같은 의미에요. 여전히 아끼면서도 버릴 수 없고 애달프게 여기는 그런 영화입니다.”

 

미영(최진실)은 대학 동창생 영민(박중훈)과 결혼해 행복한 신혼을 만끽한다. 하지만 어느 날 영민은 미영이 옛 직장 상사와 있는 것을 보고 그녀를 오해하고 다른 여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미영 또한 외국에서 날아온 옛 남자 친구의 편지를 받고 향수에 빠져들게 돼 미영과 영민의 결혼 생활은 위기를 겪는다.

 

5. <투캅스> (Two Cops)

1993년 | 강우석

“개인적인 사연이 있는 영화에요. 제가 고등학교 때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구상하면서 ‘투캅스’라는 제목을 생각해냈거든요. 근데 우연치 않게 이 영화가 극장에 걸린 거예요. 와, 영화는 너무 재밌었는데 제가 만든 제목을 앞으로 못 쓴다는 게 아깝더라고요. 그 친구는 영화 재미있다고 보는데 전 아쉬웠죠. 그러다 연기 시작하고 강우석 감독님의 아성을 느꼈어요. 늘 존경하고 있다가 <글러브>란 영화로 같이 작업하게 됐습니다. 감독님께는 이런 이야기를 안 드렸지만 제겐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능청스럽게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조 형사(안성기)는 불법 영업 중인 가라오케에서 적발당해 경고를 받고 새 파트너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세 파트너 강 형사(박중훈)가 자신과 달리 원칙대로 달려드는 스타일임을 알고 적당히 사는 법을 가르치려 하지만 수원(지수원)이란 여자가 나타나며 본의 아니게 특정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연극과 공연까지 무대를 가리지 않고 연기에 뛰어든 지 어느 덧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조진웅은 여전히 배우를 예찬한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왜 안 할까 싶을 정도로 배우는 너무 재밌는 직업이에요. 누군가가 만든 한계를 내가 뛰어넘을 수도 있고 내가 표현한 것들이 많은 사람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잖아요. 그게 정말 좋아요.” 그의 말대로 한계를 깨고 부딪치며 재미를 찾고 있기에 배우 조진웅은 권태에 빠지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늘 최선을 다해 자신이 만든 캐릭터, 자신이 참여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깊게 박히길 바랄 뿐이다. “전 연기 안 하고 집에 있을 땐 그냥 좀비에요. 근데 연기는 상상력을 활용하니까 무궁무진해서 즐겁게, 의욕적으로 하게 돼요. 배우로선 내가 뭔가 부족하거나 비슷해진다는 건 판단할 순 없는 거 같고 그저 최대한 열심히 표현하는 것밖에 없는 거 같아요.” 관객이 있을 때 예술이 의미가 있다는 조진웅은 정직하게 웃었다. 최선을 다한 사람의 행복한 웃음이었다. 이대로라면 무엇이 됐든 진심을 다해 캐릭터와 타인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앞으로도 넓게, 강하게 퍼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