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나와 함께 <스토커>를 만든 음악들

영화 <스토커>의 주인공은 소녀다. 인디아(미아 와시코브스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18번째 생일을 맞이하고, 아버지를 잃은 동시에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삼촌(매튜 구드)을 만난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나이,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낯선 남자의 등장. 인디아가 처한 상황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상징과 은유로 가득하다. <데미안>을 떠올리게 하는 달걀이나 전작 <박쥐>에 이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구두, 불길하게 소녀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거미 등은 촘촘히 스크린을 채우고 원경과 근경에서 각기 달리 보이는 풍경화처럼 풍성한 신들을 형성한다. 결국 “구출”되거나 “완성”되길 바란 소녀가 스스로 알을 깨고 뛰쳐나온 성장담은 피를 재물로 요구하지만 보는 이를 홀릴 만큼 아름답다. 신경질적으로 예민한 리듬을 가진 소녀의 이야기는 특이함을 넘어 비정상에 가까워 보이지만 박찬욱 감독은 오히려 그 반대에서 바라봤다고 한다.

 

“나는 반대로 말하고 싶어요. 굉장히 특이하지만 따지고 보면 보통 사람의 이야기로도 적용할 수 있죠. 소녀에게 접근하고자 하면서 봤던 건 그들은 어른들에 대한 반감, 속된 것과 속물스러운 것에 대한 경멸, 싸구려 같은 것에 대한 두드러기가 있다는 거죠. 인디아와 내 딸이 동갑인데 적어도 그 아이는 그렇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까다롭고, 쉽게 인정하지 않고, 어른들이 손대는 게 싫고. 인디아는 영화에 묘사된 대로만 보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사람이지만 세상의 모든 사춘기 소녀의 특징을 조금 과장해 놓은 것뿐이에요. 어른들의 세계를 속되다고 생각하고 경멸하지만 자기도 삼촌의 방에 잠입해서 소지품을 열어보는 짓도 하죠. 그런 양면성이 사춘기적인 면이라 생각했어요.”

 

소녀 시절을 통과해온 여자라면 누구든 단박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사춘기에 대한 이해는 그대로 영화에 녹아있고, 박찬욱 감독이 만들었기에 더욱 매혹적인 성장담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할리우드라는 낯선 환경에서도 여전히 “영화 만들기에 대한 관념은 변함이 없다”는 박찬욱 감독이 그와 함께 <스토커>를 만든 음악들을 소개했다.

1. Nancy Sinatra & Lee Hazelwood ‘Summer Wine’이 수록된 <Heat Wave: A Summer Groove Playlist>

“아주 예전 노래인데, 이비(니콜 키드먼)와 엉클 찰리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에서 나온 곡입니다. ‘Summer Wine’과 ‘Stride La Vampa’를 제가 골랐죠.” 전설적인 재즈 보컬 프랭크 시나트라의 딸 낸시 시나트라와 컨트리 가수 리 하젤우드가 함께 불렀다. 영화 <킬빌>의 OST ‘Bang Bang’으로도 잘 알려진 낸시 시나트라의 나른한 음색과 리 하젤우드의 중량감 있는 보컬이 어우러져 크게 히트했으며, 국내에서도 1960년대 박인희, 이필원에 의해 번안되어 불리기도 했다.

2. Sugar Vendil, Trevor Gureckis ‘Duet’이 수록된 <Stoker OST>

“인디아와 엉클 찰리가 함께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서 나오는데, 전혀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 배우들이 연습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일찌감치 작곡해야 했어요. 필립 글라스에게 각본도 보여줬고, 인디아와 엉클 찰리 사이의 성행위나 다름없는 장면이라고 설명했죠. 덮어놓고 성행위를 묘사했다기보다는 연애의 전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까요? 그랬더니 남녀가 피아노를 함께 칠 때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둘러서 치기도 한다는 얘길 하더군요. 그래서 바로 그날로 시나리오를 그렇게 고쳤죠. (웃음) 곡도 거기에 맞게 부탁했고요.”

 

3. Giuseppe Verdi의 <Verdi- Il Trovatore>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에서 집시 여인 아주체나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부르던 &apos;불꽃은 타오르고&apos;는 그 이름처럼 강렬하고 폭발적인 아리아다. “극 중에서 이 오페라가 세 번 등장해요. 엉클 찰리의 휘파람으로 나오고, 인디아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도 나오고, 나중에 중요한 알리바이를 댈 때도 나오죠.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연주는 마릴린 혼이라는 다른 가수가 부른 버전인데 이 곡도 참 좋습니다.”

4. Clint Mansell의 <Stoker OST>

“엉클 찰리가 계단 위에서 인디아에게 하이힐을 신겨 주는 장면에서 쓰인 곡이에요. 이 장면의 음악을 가장 좋아해요. 제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면이기도 하고요.” <레퀴엠>, <더 레슬러>, <블랙스완> 등 등장인물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압도적인 영화음악을 선보여온 클린트 먼셀이 <스토커>와 함께 한 곡은 ‘In Full Bloom’. 여주인공 인디아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순간을 역시 파워풀하게 고조시킨다.

5. Clint Mansell의 <Stoker OST>

“마지막 곡은 영화 끝에 나오는 에밀리 웰스의 주제곡입니다. 에밀리 웰스는 영화 편집이 끝날 무렵 뮤직 에디터가 추천한 가수였어요. 처음 듣는 가수였는데 곡이 좋았어요.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의 곡을 커버한 힙합 풍의 곡이었는데 그걸 그대로 쓰기엔 영화와 어울리지 않아서 새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죠.” <스토커>의 마지막 장면부터 엔딩 크레딧까지 이어주는 에밀리 웰스의 목소리는 <007 스카이폴>의 주제가를 불렀던 아델의 것과 비견될 정도로 완벽한 매칭을 선보인다. 소녀의 남다른 성장담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보컬이 있을까?

<스토커>는 박찬욱 감독이 각본을 직접 쓰지 않은 최초의 영화이며 그가 할리우드에서 만든 첫 번째 영화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 그의 소감은 어떨까? “<스토커>는 <박쥐>를 만들 때 원작 <테레즈 라캥>을, <올드보이>를 만들 때 원작 <올드보이>를 각색한 것처럼 웬트워스 밀러의 각본을 원작이라고 두고 각색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할리우드라는 바뀐 환경에서 만드는 과정은 새로 데뷔하는 기분이었지만 영화를 끝내놓고 드는 생각은 다 비슷하다는 거예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다 비슷하고, 공정은 말할 것도 없고. 더군다나 한국의 기술 수준이 높기 때문에 미국에 가서 특별히 우와 하고 놀랄 것도 없었고요. 영화 만들기에 대한 관념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