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 “배우로서 전력투구하고 싶다”

어느 자리에 있든 믿음이 가는 배우가 있다. 벌써 30년 가까이 배우로 살아 온 한석규는 부드럽고 친근한 남자부터 인생 한 방을 노리는 제비는 물론 시니컬한 형사, 능글맞은 선비까지 어떤 역할을 맡든 작품을 지배했다. SBS <뿌리깊은 나무>의 욕하는 왕, 이도를 거쳐 최근 영화 <베를린>의 카리스마 있는 국정원이었던 그가 까칠한 시골 음악 선생님 상진으로 돌아온 <파파로티>에서도 그 존재감은 유효하다. 옆집 아저씨처럼 학생들을 혼내다가도 제자 장호(이제훈)를 위해 건달 앞에 고개를 숙이는 그는 분명 코미디와 드라마를 오가는 이 작품의 중심이며 견인차다. 노래를 향한 장호의 꿈을 위해 묵묵히 도와주는 상진처럼, 현장에서 동료들을 챙기며 하모니를 만드는 배우 한석규를 만났다. 배우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한석규의 세계는 점점 깊어지는 듯했다.

Q. 얼마 전 <베를린>에 이어 <파파로티>까지 영화로 자주 만나게 됐다.
한석규: (이)제훈이 입영 날짜가 예정돼 있어 개봉 날짜가 그렇게 됐다. 사실 <파파로티> 시나리오는 몇 년 전에 봤는데 처음에는 캐스팅 제의로 받진 않았고 모니터 차원이었다. 시나리오를 쭉 읽는데 자연스럽게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도 마음에 들었고 음악까지 들어가 있었다. 워낙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고 배우 이전의 꿈이 성악가이었으니까 그 소재가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Q. 스승과 제자 이야기가 끌린 이유는 뭔지 궁금하다.
한석규: 7,8년 전쯤인가. 11살 많은 큰 형과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 형님은 존경하는 스승님이 2명이나 있더라. 나는 그런 분들이 없어서 형이 부러웠다. 그리고 우연히 EBS 청소년 대담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충격을 많이 받았다. 아이들끼리 학교 폭력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프로그램인데 그 친구들이 기성세대보다 문제점을 더 정확히 알고 있더라. 하지만 청소년들 스스로 내린 결론이 쳇바퀴 같은 삶이라 힘들다는 걸 듣다보니 기성세대로서 책임감과 자괴감이 느껴졌다. 내가 하는 일은 연기니까 연기로 그 친구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어렵겠지만 지치지 말고 일단 하는 게 중요하니까. <파파로티>가 거창한 건 아니지만 청소년들이 보고 조금의 위안을 얻거나 꿈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Q. 이번에 맡은 상진이란 캐릭터는 굉장히 능글맞다가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인물이다. 어떤 이유로 이 역할을 맡았나.
한석규: 상진은 감정의 진폭이 넓어서 매력적인 인물이다. 한 번 꿈을 잃었던 인물이지 않나. 실제로 그런 인물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들의 속마음은 어떨까, 그 사람이 자기가 못 다한 꿈을 꾸는 제자를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 궁금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보는 마음이 있을 것 같았다. 질투도 느끼지만 그 제자를 통해 내가 포기했던 꿈을 대신 이룬다는 게 진솔해서 멋졌다. 물론 빤한 내용일 수 있지만 그걸 어떻게 연출하느냐, 연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Q. 일상적인 캐릭터를 오랜만에 연기한 것 같다. <뿌리깊은 나무> 때는 왕이었고 <베를린> 때는 국정원 요원을 맡았었다.
한석규: 그렇다. <뿌리깊은 나무>의 이도와 <베를린> 정진수까지, 연속 세 번으로 히스테릭한 인물을 맡게 되면 연기 하는 사람도 지겹고 관객 분들도 지겨울 것 같았다. 일상적인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맡았다기보다 매 작품마다 다른 인물을 계속 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거다. 사람은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지 않나. 그래서 나름대로는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를 하고자 했다. 근데 시간이 흘러 가만히 내 작품을 되돌아보니 ‘그래봐야’라는 생각이 든다. (웃음) 나를 관통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이 많은 스타일이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역할을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기회가 되면 한 무대나 영화에서 사람의 다양한 모습과 감정을 다 보여줄 수 있는 연기는 한 번 해보고 싶다.

 

Q. <파파로티>는 코미디와 드라마가 적절히 섞여 있는 영화다. 특히 상진이란 캐릭터가 그 균형을 잘 살린 대표적인 인물인데, 연기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한석규: 현장에서 감독님, 제훈이와 톤을 어떻게 잡을지 고민했다. 왜냐하면 <파파로티>는 완전히 코미디로 접근할 수도 있고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다가갈 수도 있지 않나. 톤은 물론 감독님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지만 다 같이 생각이 맞아야 연기가 잘 나오는 거니까 대화를 많이 한 것 같다. 이번에 (오)달수나 다른 분들은 유머를 잡고 있어서 난 드라마를 끌고 가는 것에 집중했다.

 

Q. 후배 연기자와 동료들이 많았는데 현장에서는 어떤 부분을 신경 썼나.
한석규: 동료들과의 앙상블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작품 뿐 아니라 호흡은 늘 중요하지만 연기하면 할수록 동료들과 어떻게 함께 가는 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걸 이번에 또 안 거다. 특히 제훈이와는 붙는 신이 많으니까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빨리 편해져야 했다. 제훈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초록 물고기>를 봤다고 하더라. (웃음) 내가 어릴 때 신성일 선생님 작품 본 것도 생각나고 신인 때 선배님들이 얼마나 어려웠던 건지도 생각나 제훈이에게 먼저 편하게 다가가려 했다. 그래야 연기가 좋아진다. 주고받는 호흡이 차곡차곡 쌓이면 영화도 풍성해지는 거고.

Q. 선배로서 편하게 이제훈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있었나.
한석규: 욕했지. (웃음) 물론 상대방은 내가 욕하는 이유, 빨리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아니까 편하게 하는 거다. 해보니 현장에서도 잘 먹힌다. 후배들 입장에선 이런 내가 웃기고 귀엽기도 하겠지. 또 어떨 때는 자리를 비켜줘야 하기도 했고 밥도 사줬고 연기 이야기도 너무 많이 하면 부담스러울 테니 적당히 했다.

“관객이 배우의 모든 것을 공감할 수 있도록 연기해야 한다”
Q. 아무래도 과거 본인이 선배들과 많이 작업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을 것 같다.
한석규: 맞다. 보통 신인은 같은 장면에서 한 번 더 촬영을 하고 싶어도 부탁하기 어렵지 않나. 그럴 땐 내가 나서서 (촬영을) 한 번 더 가보자고 나서는 거다. 옆에서 보면 후배들이 아쉬워하는 게 느껴지니까. 예전에 내가 선배들에게 많이 받은 도움이기도 하다. 후배들은 물론 선배들과 작업하는 게 어렵겠지만 좋은 점이 정말 많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불편함을 느끼는 것 그 자체도 좋은 거다. 자기들도 나중에 그렇게 되거든. (웃음) 또래들하고만 연기하는 것보다 선배들이 신을 요리하고 리듬을 조절하는 걸 보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Q. 윤종찬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보통 배우들을 힘들게 하는 스타일이라고 들었다. (웃음)
한석규: 배우와는 또 다른 위치니까 연출하시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실 거다. 이번엔 배우들에게 맡기고 편하게 한 영화라고 어떤 인터뷰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현장에서 많이 열어두셨다. 한 번은 배우에게 디렉팅이 너무 없는 거 아니냐고 말씀드렸다. 감독님이 “좋은데요”하면 “이거 진짜 좋은 거예요?” 되묻기도 하고. (웃음) 이런 스타일의 작업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배우들로 하여금 책임감을 많이 느끼게 하고 창의적으로 움직이게 하니까 결국은 참 좋은 거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면 정말 어렵지 않나. 대사 뿐 아니라 신을 관통하는 여러 가지를 많이 생각하고 준비해야 하니까. 개인적으로 이런 작업을 좋아한다.

 

Q. 30년 가까이 연기 하면서 연기를 넘어 연출이나 영화 전반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는 않나.
한석규: 한국에서는 감독이 연출만 하는 경우는 드물고 보통 시나리오도 직접 쓴다. 마흔 전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서 연출까지 생각을 안 했다. 근데 시간이 지나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더라. 그 중 하나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영친왕 이야기다. <뿌리깊은 나무> 하면서 든 생각인데 영친왕은 특별한 것 같았다. 왕가가 있는 다른 나라들 보면 보통은 그 나라에서 직접 없애거나 스스로 유지했다. 하지만 조선은 다른 나라에 의해서 없어진 거 아닌가. 그런 역사나 차이점을 말해보고 싶었다. 그래도 직접 연출하기보다 내 이야기를 공감할 수 있는 연출자와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Q. 최근 출연한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늘 연기에 만족을 못한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아쉬움을 메우려고 어떻게 노력하나.
한석규: 전에 실수했던 걸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이번 영화도 볼수록 아쉽더라.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나중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 때 실수 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매번 작품이 달라져도 연기하는 환경이 완전히 다르진 않다. 혹시 어떻게 해야 연기력이 늘 수 있는지 고민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렇게 조금씩 쌓아가다 보면 연기도, 사는 것도 나아지지 않을까.

 

Q. 연기를 잘 한다는 기준이 있나.
한석규: 배우가 아닌 관객으로서 뚝 떨어져 봤을 때, 저 배우가 하는 모든 게 공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최대한 연기를 안 하듯이 하고 싶은 거다. <파파로티> 에필로그에서 특히 그 부분을 신경 썼다. 잘 자란 제자가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을 부르는 걸 극중에서는 상진이 보는 건데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도 상진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지 결정하는 게 어려웠다.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표현 방식은 여러 가지니까. 하지만 그런 테크닉에 현혹되지 않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장호를 보면 자연스럽게 연기가 될 거라 생각했다.

 

Q. 늘 연기에 대한 생각도 많고 그만큼 열정도 강한 것 같다. 앞으로 배우로서 가장 해보고 싶은 게 뭔가.
한석규: 얼마 전에 멜로를 다시 해보고 싶다고도 했는데,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멜로 외에도 다양하고 새로운 연기를 계속 하고 싶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가르쳐 줄 재주는 없는 것 같고 그저 연기를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누군가가 인생을 한 번 더 살게 되면 배우를 하고 싶은지 묻던데 그건 아니다. 배우는 실컷 하고 있으니까. 그만큼 이번 생에서 연기로 전력투구 하고 싶다는 거다. 연기는 그렇게 열심히 하고 직업을 떠나서 개인적으로는 그냥 편안했으면 좋겠다.

사진제공. 쇼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