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중요한 건 지금이다. 슬프게 왔던, 기쁘게 왔던”

KBS <그들이 사는 세상>의 지오(현빈)는 비현실적인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동료를 돌아보는 따뜻한 마음과 드라마에 대한 깊이를 동시에 가졌고, 얼마 전 끝낸 미니시리즈에서는 높은 시청률까지 기록했다. 하지만 그 점에서 <그들이 사는 세상>의 표민수 감독은 더욱 비현실적인 인물일지도 모른다. 지오마저 때론 욕설과 손찌검을 쓰는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표민수 감독은 스태프에게 존댓말을 쓰고, <거짓말>과 <바보 같은 사랑> 등 한국 드라마의 획을 그은 걸작들은 물론, 최고 시청률 40%를 넘긴 <풀하우스>와 같은 로맨틱 코미디로 대중적인 성공까지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달성한 그 시점에 <인순이는 예쁘다>로 전과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을 독특한 방식으로 그렸고, 그 다음 작품으로 노희경 작가와 6년 만에 함께하는 <그들이 사는 세상>을 선택했다. 한국 드라마의 ‘뉴 웨이브’에서 어느덧 한국 드라마를 대표하는 중견 연출가가 된 표민수 감독이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독>이후 노희경 작가와 6년만의 재회다. 다시 작업해보니 어떤가.
표민수
: 노희경 작가와는 <고독>이 끝난 뒤 한 작품만 따로 하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둘이 각각 다른 곳과 계약이 돼 있어서 함께할 기회를 찾기 쉽지 않았다. 이번에도 내가 작년에 <인순이는 예쁘다>를 하니까 노희경 작가가 한 해를 쉬면서 기다려줬다.

서로 어떻게 달라진 것 같나.
표민수
: 노희경 작가는 전보다 더 자유로워 졌다. 인생이나 사랑은 어떤 것이다라는 선언이 사라지고, 그것들이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 같다. 나는 경제적인 논리를 벗어나게 된 것 같다. 전에는 추운 날씨에는 야외 촬영 말고 세트로 돌리자는 식이었다. 그래서 배우들 집중력을 높여서 감정을 잘 살릴 수 있게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독>을 끝내고 난 뒤 그런 게 작가의 상상력에 방해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는 눈이 내리는 어딘가를 보여주고 싶은데, 어려우니까 안으로 들어와서 감정만 살린다고 하면 하고 싶은 걸 못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번에는 노희경 작가가 최대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는 감정을 무엇이라고 재단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당신에게 새로운 작업일 것 같다. 당신은 노희경 작가가 대본을 이미 완결까지 다 쓴 대본을 보며 연출을 한다. 여기에 윤여정부터 최다니엘에 이르는 다양한 배우들을 모두 끌어안고 작품을 진행시켜야 하고.
표민수
: 나는 <그들이 사는 세상>을 통해 스케일을 조율하는 부분을 배운다고 생각한다. 20여명의 배우들이 주연 조연으로 완전히 구분지어지는 게 아니라 스머프 마을처럼 한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캐릭터를 살리는 것이라 그들 각각의 아우르는 게 쉽지는 않다. 그래서 고정된 시점보다는 지오에서 준영으로, 민숙에서 수경으로 시점이 넘어가는 연출을 많이 한다. 인물과 인물 사이가 나눠지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이어지는 거다. 아무래도 노희경 작가가 대본을 미리 완성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생각이 가능한 것 같다. 다만 대본이 다 나온 상태라 인물들의 미래까지 알고 있으니까 실제의 삶을 사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웃음)

많은 캐릭터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풀어나가는 건 생소한 형식인데, 대중적인 부분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표민수
: 처음에는 오히려 대중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각자의 인생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리얼한 감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시청자들도 “아, 맞다”하면서 공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 애는 아냐”라는 반응을 하는 것 같다 (웃음)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착하고 싶어서 ‘순정’을 원한다고 하지 않나 (웃음) 보통 드라마에서는 순수한 사랑을 하느냐마느냐로 선악마저 나누는데, <그들이 사는 세상>은 순정부터 ‘잠재적 애인관계’까지 다양한 감정들이 그대로 표현된다.
표민수
: 리얼하게 가고 싶었다.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게 형성돼 있나. 그걸 무엇이라고 재단하고 싶지 않았다. 순정의 문제도 그렇다. 나는 <그들이 사는 세상>을 만들면서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는 캐릭터를 생각했다. 과거의 읊조림이 아니라 현재 무슨 상황에 있고, 어떤 고민을 갖고 있고, 내일은 어떻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지.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삶이 계속되면서 사람은 앞으로 나간다는 건가.
표민수
: 그렇다. 이 드라마는 매 회 분절이 되는데, 그렇게 각각의 방영분이 다음 회에 영향을 주지 않고 싶었다. 연기자들에게도 웬만하면 전의 감정들을 잊으라고 한다. 중요한 건 지금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
표민수
: 드라마는 곧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보통 드라마는 기쁘면 기쁜 사람, 슬프면 슬픈 사람 하나만 표현한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일 초에도 몇 번씩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최대한 다면화되고, 자유분방한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좋았다, 싫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지만 사람들은 실제로는 눈빛만 봐도 감정들이 바뀌지 않나.

“지오와 규호, 아마도 둘은 서로를 부러워하면서도 시샘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생각은 MBC <넌 어느 별에서 왔니>부터 꾸준히 이어진 것 같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에서는 캐릭터들이 한 씬 안에서 로맨스와 비극 사이를 오간다.
표민수
: 노희경 작가와 많이 이야기하는 게 “행복과 불행은 같이 온다”는 거다. 100만원을 벌었으면 그걸 쓸 생각을 하고, 그걸 다 쓰면 또 벌 생각을 하는 것처럼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에 대한 대가가 온다. 행복과 불행, 진실과 거짓. 그래서 보통은 이분법으로 나누는 그 두 가지를 다 보여주고 싶었고, 그 모습들을 모두 캐릭터 안에 구현했다. 캐릭터건 사건이건 코미디와 정극이 같이 흐른다.

그러면서 <그들이 사는 세상>의 카메라는 더 관찰적으로 변한 것 같다. 캐릭터의 감정을 강조하는 것 보다는 지금 이러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상황 그 자체를 보여주는데 주력한 건가.
표민수
: 이번 작품은 촬영감독에게 객관성을 유지하고 싶다고 했다.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기법상으로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냥 담아내서 보여주면, 주관적인 판단은 보는 사람이 하도록 맡기고 싶다. 분할 컷을 많이 넣은 것도 그런 이유다. 노희경 작가가 분할 화면을 하고 싶어 하기도 했지만, 연인들이 전화를 할 때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진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 그들 각자가 전화를 할 때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서로 대화하는 상대방의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건 <그들이 사는 세상>의 이야기가 곧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관찰을 하는 것이라는 얘기로 들린다.
표민수
: 맞다. 그들을 통해 우리를 보는 거다. 준영이가 ‘아킬레스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사람들은 각자 생각하는 아킬레스건이 있을 것이다. 그건 벗어나려고 해도 잘 안될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사실 내 아킬레스건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보면 가당치도 않을 수도 있다. “뭘 저런 걸 가지고 그래”라고 반응할 수도 있고. 나에 대한 나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을 모두 보여주면서 우리 전체를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 전에는 누군가의 아킬레스건을 다룰 때 그 사람의 세포까지 해부해서 그가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나 극복을 하는 방법을 다뤘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그대로 있는 채로 두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걸 보여주는 식이다. 아킬레스건이 있건 없건 일은 열심히 해야 하는 거고, 그게 일하다 튀어나오면 튀어나오는 거고.

그래서 “사랑이 버거울 정도로 사는 게 힘들다”는 건 오히려 긍정으로 들린다. 사람들은 어쨌건 살게 된다는 긍정이랄까.
표민수
: 누가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하더라. 목사가 교인들에게 “천국이 좋은 사람 손들어보세요.”라고 하자 모두 손을 들었는데, “천국이 좋으면 지금 바로 가실 분 손들어 보세요”라고 하니까 아무도 안 들더라고 (웃음) 어쨌든 사는 게 좋다는 거다. 누가 죽거나 병에 걸렸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삶이 버겁다라고 하려면 어느 정도까지 돼야 할까. 무엇 때문에 힘들어서 사는 게 싫어질 정도면 인구가 줄어들어야 하지 않았겠나 (웃음)

그 긍정성이 재밌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설사 지오와 준영이가 헤어진다 해도 어쨌건 그들은 저런 식의 인생을 살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쟤들이 완벽한 행복이나 나락으로 가지 않고 저렇게 고민하고 엮이면서 앞으로 갈거 같아서 왠지 낙관적인 기분이 들더라.
표민수
: 노희경 작가도 본인의 긍정성이 좋아졌다고 하더라. 사람이 아프면 다시는 아프지 않게 대비 하지 않나. <고독>이후에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 대신 행복을 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전까지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건 고통을 다 쏟아내서 정화시킨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을까? 그 반대의 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작품성을 추구하는 지오뿐만 아니라 시청률을 노리는 규호도 아우르는 시선은 그런 변화에서 나온 건가.
표민수
: 솔직히 드라마는 초반 시청률을 잡아야 쭉 가는 면이 있다. 그래서 규호는 후반이 좀 허물어져도 방송 전에 1,2회에 최대한 완성도를 높이는 거라고 생각한다. 지오는 꾸준히 잘 만들어 나가는 거고. 아마도 둘은 서로를 부러워하면서도 시샘하지 않을까 싶다. 나도 과거에 정극을 하면서 코미디를 폄하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갖지 못했던 부분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풀하우스>를 만들면서 사람을 웃게 만들고, TV를 보면서 환하게 기쁘게 만드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게 되기도 했고. 그런 면에서 지오와 규호는 내 안의 모습을 반씩 나눈 것 같기도 하다.

“즐거움을 주는 축제였으면 좋겠다”

외주제작사로 나간 뒤 <넌 어느 별에서 왔니>나 <풀하우스>가 로맨틱 코미디에 대한 다양한 시도를 했고, <인순이는 예쁘다>는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그런 것들이 <그들이 사는 세상>을 통해 모두 표현되는 것 같다.
표민수
: 그런 말을 들을 때 정말 기분이 좋다. 정말 내가 배워가나 보다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걸 다 펼쳐보고 싶었다. 이야기는 눈물을 눈물로 풀 수도 있지만 눈물을 웃음으로, 웃음을 눈물로 갈 수도 있다. 그건 내가 보다 자유롭게 작품을 바라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5회에서 민철과 윤영의 과거사를 지오와 준영이 출연하는 연극처럼 꾸민 건 원래는 비극이었던 이야기를 희극처럼 풀어 본 거다. 현빈이 과거의 민철이를 연기할 때 이 코미디로 풀 거냐 정극으로 풀 거냐고 물어봤는데, 나는 전체적으로 따뜻하게 가고 싶다고 했다. 이게 그냥 정극이었다면 노희경 작가가 과거의 민철과 윤영이 직접 나오는 것으로 썼을 것이고, 이걸 회의 후반부로 배치해 폭발하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전반부에 배치한데는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코미디로 풀다가 민철이가 가족을 버리고 떠나는 순간이나 윤영에게 충격을 받아 TV를 부술 때 정극으로 간다고 했다. 예전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사람의 인생을 보여줄 수 있게 된 것 같다.

당신이 <그들이 사는 세상> 속의 세상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표민수
: 축제다. 인생의 어느 한 부분에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가 축제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자의 인생으로 돌아가겠지. 그게 즐거움을 주는 축제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많이 들더라. 슬프게 그 자리에 왔던, 기쁘게 왔던.

글. 강명석 (two@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